오피니언 사설

예산안 12월 2일 시한, 반드시 지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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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회선진화법은 폭력·몸싸움·날치기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과반수라는 민주주의 표결 원칙을 버리고 사실상 ‘60% 찬성’을 도입함으로써 심각한 국회 기능 장애를 초래했다. ‘동물국회’를 막으려다 ‘식물국회’가 됐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런 국회선진화법에서 유일하게 과반수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예산안 처리다. 여야가 11월 말까지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정부가 낸 예산안이 12월 1일 열리는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며 12월 2일 원안이나 수정안을 놓고 표결이 진행되도록 규정된 것이다.

 이 조항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대는 크다. 예산안이 헌법이 정한 시한(12월 2일) 내에 통과된 마지막 기록이 2002년이다. 이후 예산안 파동은 ‘동물국회’의 핵심 원인이었다. 각종 시국 현안과 여야의 정쟁이 얽히면서 예산안은 새해를 코앞에 두고서야 겨우 통과되곤 했다. 몸싸움과 날치기도 많았다. 2012년 제정된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예산안 12월 2일 표결’이 처음 적용되는 해가 올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조항을 위협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새누리당이 법에 따라 지방교육청에 맡기려 하는 누리과정(3~5세 무상보육) 예산,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담뱃세 인상, 새정치민주연합이 요구하는 법인세 인상, 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에 대한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 등을 둘러싸고 예산안 갈등이 거세게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야당은 여야가 합의만 하면 예산안 처리를 늦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여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시한은 지켜져야 한다고 맞선다.

 예산안 문제에 관해 한국 국회는 새로운 관행을 정립해 나갈 필요가 있다. 누리과정 예산이나 무상복지의 범위 문제, 담뱃세냐 법인세냐 같은 조세정책 등은 여야가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의지만큼 야당의 합리적인 견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에도 불구하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회는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한다. 두 번째, 정책적 고려가 아닌 정략과 정쟁이 예산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사·자·방’ 국정조사는 예산과 별도로 협의돼야 한다.

 미국은 예산안 표결에 대한 강제적 제도가 없어 지난해 10월 연방정부 폐쇄라는 국가적 혼란을 겪었다. 하원 다수를 차지한 공화당이 오바마 민주당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보험 개혁에 반대하며 이듬해 예산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올해부터 예산안 법정시한 표결이라는 방책이 작동된다.

 시행 첫해부터 법이 흔들리면 국민의 불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야당의 시각에서 정부 예산안에 잘못이 있더라도 법은 법이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집권세력이 지는 것이다. 여야는 이미 세월호 특검에 합의하면서 상설특검법을 어긴 사례가 있다. 이 법도 처음 시행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오락가락’이 예산안에 반복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