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늙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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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골짜기를 흐르는 물을 보고 「명월이 만건곤한데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읊조리는 따위는 서양, 적어도 영국에서는 절대로 없대도 괜찮다. 우리 진이만한 시인이 없어서가 아니다. 물이 그렇게 성미 급하게 흐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런던의 한강인 템즈강을 보자. 하도 흐르는게 느려 얼핏 봐선 대관절 이 강이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는 건지 분간하기 어렵다. 실상, 하루 반나절쯤은 물이 강꼭대기쪽으로 거꾸로 흐른다. 지세가 낮아 밀물이 일면 바닷물이 런던 북쪽까지 밀려 오르기 때문이란다. 거꾸로도 흐르는 판이니까 가다가는 강물이 우두커니 서있을 때도 있다.
비가 많이 왔대서 크게 수위가 불어나지 않는다. 가뭄이 쳤대서 물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물살이 어쨌대서 청탁간 물빛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일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강치곤 무척이나 영국다운 강이다. 느리고, 흐리고, 꾸준하고, 기복 드물고, 잘 변하지 않고, 살짝살짝씩들 미친 듯하고….
거기다 견주면 우리 한강은 꽤도 다르다. 우선 훨씬 솔직한 강이다.
「물은 낮은 골로 흐르니라」하면 한때의 예외 없이 밑으로 밑으로 직향해 흐른다. 장마가 지면 불고 가물면 물이 마른다. 무엇보다 물살이 훨씬 더 빠르다. 「쉬이 감을 자랑 마라」라는 말이 나오게도 됐다. 물이 빨리 빠지니까 수색이 맑다. 속이 들여다보이게 맑다.
템즈강이건 한강이건 양쪽이 물론 다 타고난 팔자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지세가 어디나 경사져있다. 구배심한 땅이라 떨어진 빗물이 늑장을 부릴래야 부리기 어렵다. 물이 빨리 빠지니까 격하기도 쉽고 바뀌기도 잘한다.
그것관 달리 영국이란 소반 같은 평지다. 비탈이 없으니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 흐르는 것도 바뀌는 것도 뭐도 느리게 마련이다. 그게 다 제 마음대로가 아니니까 자연이고 절로 있는 거니까 굳이 좋달 것도, 굳이 나쁘달 것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강이 성미 급하게 흐른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사람들 또한 거기 닮은 데가 있다면 그 장을 쳐들어 크게 자랑할 것도, 그 단을 집어 탓할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으면 되고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라고 무슨 풍월 읊듯한 얘기를 해놓고 말았는데 워낙 하고자 한건 우리가 늙은데에서도 서양사람 보다 빠른 것 같고, 그게 청산리 벽계수 흐르듯 어쩔수 없는 것이기 보단, 또는 그와 더불어, 「점잔찮게…」하는 우리식 체면이란 것 탓이고, 뭐가 급하다고, 늙는데서까지 그리 서둘러야 하느냐 하는 거였다. <박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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