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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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비갠 오후>
강세화

<경남울산시신정동182의3>
소나기 지나간 뒤
맑게 씻긴 처마 끝에
재비 한 쌍이 와서
젖은 깃을 터는데
마당가
빨간 채송화가
발돋음해 듣는다.

<차밭골>
오아회

<부산시남구대연4동1172의78>
그 언젠가 차밭골에
그분이 살았대요,
초가삼간 흔한 시절
한칸 빌어 살았대요,
숲속에 다람쥐하고
손도 잡고 놀았대요.
노송숲도 좋아하고
계곡물도 좋아하고,
바람소리 벗 삼아서
노래도 부르시고,
본이면 냉이국 달래무침
무척 즐겨하셨대요.
차밭골도 이제 와선
옛날이 아닌걸요,
노송숲도 그대로며
계곡물도 흐르지만,
이 영도 뉘라서 알고
들먹인들 하나요.

<우기>
유윤화

<서울강동구가악동 주공아파트2동 502>
떠난 것들로 가득한
내 유년의 빈벌 위에
열두 이랑 한을 갈던
젖은 발목 낮은 음성
저물녁 아린 몸살이
산조되어 내린다.

<대합실>
신진식

<경기도고양군중면백석3리252>
어둠 깔린 대합실에
쏟아지는 아쉬움들
바람도 역겨운 때
쪽빛 별도 숨죽이고
풀어 논
이야기꽃을
주워담는 마음자리.
창틀 위에 여장을 푼
빛이 여린 먼지더미
싹트는 사연마다
은혜의 올 감아 놓고
몇해전
새기던 약속
거미줄에 잠을 잔다.

<회상>
이영주

<대전시중구중촌동280의8>
1
누워서 사삭하는
세월의 덤을 얻어
흐르는 시냇물에
한 조각 넋을 띄우고
고요히 하늘을 향해
하얀 돛을 올린다.
2
잔잔한 물 이랑에
나이테 (연륜) 먼지 헹구고
열레빗 반달 아래
얽힌 가슴 올올이 풀어
버들꽃 하얀 나래로
봄꿈 실어 띄우려.
3
오솔길 꼬불꼬불
새 소리 물 소리 따라비
바람 가락 맞추며
비틀거린 저 발자취
처마끝 반딧불처럼
가뭇 가뭇 아른댄다.

<포도알>
최태규

<서울영등포5가61·문충길댁>
궁굴 긍굴
굴리다
어금니로 으적
깨물면
볼 가득
신맛
으스스
몸떨림
아가야
울음 보채는 눈
싱그런
포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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