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90개국의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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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번만 하더라도 사실은 작년 9월 일본 문부성에 의해 교과서왜곡이 시도됐었음을 정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찌된 연유에선지 정부는 이 엄청난 사안을 묻어둔 채 지나쳐버렸다.
진실을 왜곡한 교과서가 새책으로 단장돼 나와버린 지금에야 정부는 뒤늦게, 그것도 빗발치는 여론의 성화에 못 이겨 시정을 위한 발동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부의 뒤늦게 걸린 발동은 그나마 이렇다 할 투지도 엿보이지 않는 뭔가 느슨하다는 인상이었다.
정부가 유일하게 기민한 대응을 보인 것이 있었다면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이란 것에 대해 재빨리「시정자세」를 보인 것이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린 점이라고나 할까. 마치 일본정부의 공식입장 제시를 정부차원에서의 종장을 위한 요식서류인양 받자마자 결재해버린 감이었다.
「투지상실」의 지적에 대해 정부는 국가간의 외교문제를 동네 싸움하듯 할 수 있느냐는 해명이지만 사실은 정부 안의 관계기관 간에 제대로 손발이 안맞지나 않았는지 묻고싶다. 당국자들은 ?인자중의 슬기를 발휘해 온건대응을 한 것이 시정을 위해 보다 전향적으로 기여했다고 자평하고 있으나 과연 그런 것인지 국민들은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중공의 즉각적인 엄중항의 및 시정촉구와 우리의「?인자중」의 대응이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 일본의「얼굴 두꺼운 대응」에 부딪쳐있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이라면 어느 쪽의 처방이 그나마 국민여론을 제대로 수렴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한다.
또 이런 문제도 한번 생각해보자.
일본은 자국 내 교과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 90여개국의 교과서를 자기네 사관에 두들겨 맞춰 개정해주도록 그동안 외교교섭을 벌여왔고 그 결과 이번의 경우와 똑같이 상당수 나라의 교과서에서 대한역사 왜곡기술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과연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1백 17곳이나 되는 우리 공관을 통해 이같은 엄청난 사실이 본국에 보고된 적이 있는지, 있다면 정부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묻고 싶다.
우방의 교과서가 왜곡된 사실에 의해 마치 한국은 독립의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국민이어서 일본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그들의 2세를 교육시키고 있다면 이는 실로 보통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주권국가로서 국가의 경영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않을까 생각된다. <류형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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