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CA 60년 해방후 혼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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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46년부터 약 4년동안 한국YWCA는 재건과 더불어 발전에의 굵직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는 누군가가 빙글빙글 맴을 돌려준 것 같이 현깃증이 나는 시기였다. 조금만 똑똑하다 싶은 사람이면 모두 정치한다고 나섰다. 정치도 훈련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건만 일제하에 전혀 백지였던 정치가 쉽게 되어질리가 없다.
그러니까 일제때 일본 사람들에게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너힉들 풋나기 보다는 내가 낫겠다』는 의미인지 잠깐 들어앉은듯 하더니 날뛰기 시작하고, 일제때 약간 친미라고 눈총을 받던 사람들이 나서고, 어쨌든 누가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일반국민들은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일반국민들도 민주주의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으니 나서서 말 잘하면 정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우기 좌익학생이나 소위 책으로 알고 있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무리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주장하여 온 나라가 혼돈에 혼돈을 거듭했다. 이렇게 혼돈을 가져오게되었던 것은 미국이 한국인의 체질을 알지 못했던 것과 일제 밀에서 민주주의 실천에 대한 훈련이 전혀 없었다는 상황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뎨서 빚어진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거기다가 북은 소련군이 빨리 긴주하여 전제주의의 신속함을 십분 발휘하였으니 정부도, 정당도 신속하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정당조직도, 정부수립도 신속히 해치운 이북은 여유있게 이남의 허술한 구석구석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파고 들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47, 48, 49년은 학원·사회·사회단체들 속에 침투하여 스트라이크로 교란시켜 공부하는 학생들 공부도 못하게 하고 일하는 사람 일도 못하게 하여 뒤흔들어놓았다.
정부도 사람마다 다르게 조각을하고 상해파·미국파 누가 확실히 정권을 잡을 것인지 파악할 수 없는 형편속에서 정부수립도 자꾸만 지연되어 이 틈을 타서 혼란을 조작하는 좌익분자들은 미친듯이 날뛰었다.
당시 필자는 이대학생저장으로 있으면서 좌익학생들의 스트라이크 때문에 매일 불안하게 지내야만 했던일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남로당원이거나 이북과 연길이 되어 있는 학생은 몇사람 되지 않았는데 다른학생들은 군중심리에 휩쑬려서 같이 떠들고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구호룰 사용하고 선생님들 중에 쪼금이라도 저희들이하는 일을 재지하는 사람은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제지도가 어디 있으며 그 관재가 전혀 무시된채 무자비한 적의 관계가 되어버린다. 이때 학생처장이나 파장은 경찰과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매일같이 학교로 학생을 잡으러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을 어떻게 형사에게 데려가라고 할 수있는가 말이다. 절대로 학교에서 직접 학생을 연행하는 것은 못하겠다고 버틸라치면 협력하지 않는다고 빨갱이아니냐고 몰아붙였다.
당시 시민들은, 특히 서울같이 큰도시의 시민들은 교통기관에서 스트라이크룰 하면 말할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필자는 그때 노량진에서 신촌 이화여대애 출근해야 했는데 사횰 간격으로 전차 종업원이 스트라이크를 하는 것이었다. 걸어서 츨근하려면 한시간반은 걸려야 했다. 그렇게 걸어서 출근해야 했던 날이 한달에도 몇번인지 모른다.
이런 혼란중에도 YWCA는 기독교 기관이어서 그랬는지 파별도없이 철저한 자원봉사의 정신속에 잡념없이 Y발전에 물두해 있었다. 이 기간은 조직에 있어 일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강화하며 사무적으로 허술했던 것을 바로 잡는데 주력을 두었다. 그래서 48년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 후윈회를 조직하고 앞으로 이 기관의 소유재산을 관리할 것을 꾀했다. 이는 그보다앞서 조대비가의 한사람인 조중구씨로 부터 막대한 임야를 기증받았기 때문에 재산을 관리할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후원회는 아직까지도 법인체로 존재하여 많은 지방Y들이 건물을 지으면 그것은 이 후원회의 명의로 등록이 되게 되어 있다. 지방Y들은 자기녜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모금하여 만들어진 재산이 연합회 후윈회의 재산으로 등록되는데 대해 불만도 있으나, 이렇게한 단체의 최고 견제기관으로서 법인체는 존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지방 Y의 재산이지만 공공소유이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률 의심해서가 아니라 YWCA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언제 누가 어떤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구조상 또는 조직으로 안전을 기하자는 신중함에서 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호주선교부르부터 동래에 있는 농예윈을 물려 받았다.
이 동래농예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계속>
※소설 『적도의 꽂』은 4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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