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는 '불계승의 사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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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프로기사 중 최강의 KO 펀처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기록은 '이창호 9단'이라고 대답한다. 이창호는 7월 21일 현재 25승을 거두고 있는데 이 중 17승을 불계승으로 장식하고 있다. KO승 비율이 무려 68%나 돼 202명 프로기사 중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달리고 있다.

KO승 비율에서 2위는 최철한 9단(44%), 3위는 이세돌 9단(42.4%), 4위는 박영훈 9단(38.2%)인데 이들과는 무려 20% 포인트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이세돌 9단은 끝없는 변화와 도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투력,시원한 승리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이세돌이 33승 중 14승을 불계로 이겨 42%가 넘는 KO 승률을 보여주는 것은 피부로 느끼는 감과 부합한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전투나 모험을 피하며 귀신 같은 계산력을 앞세워 바둑을 계가로 이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창호가 이세돌보다 KO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기록은 가끔 빗나간 통념을 일깨워준다. 혹 이창호 바둑이 이미 변했는데도 우리는 옛날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창호는 이미 변했다= 이창호 9단은 12번의 패배 중 9번을 불계로 져 패배에서도 KO율이 75%나 된다. 역시 단연 1위다. 반면 이창호의 전매 특허로 알려진 반집 승부에선 두 번은 지고 한 번은 이겼다.

이미 이창호는 반집 승부의 왕자가 아니며 오히려 미세한 계가 바둑이 불리할 수도 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창호 9단의 자세는 여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이창호의 눈빛도 바둑의 흐름도 일견 부드러워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조차 오랜 세월 각인된 이창호의 그 같은 이미지에 취해 실제를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기록은 이창호 바둑이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 아니라 벌써 변했음을 말해준다. 기록만 따진다면 이창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격렬한 승부를 펼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포인트 위주의 신예들= 10대, 20대 초의 젊은 기사들은 일반적으로 전투적 이미지를 내뿜는다. 그러나 다승 11위의 온소진 2단은 불계승이 한 판도 없다. 조한승 8단은 36승 중 단 2승만이 불계승이고 전투적인 기풍으로 유명한 강동윤 3단도 KO 승률이 20%를 밑돈다.

상대가 던지지 않으면 불계승을 거둘 수 없지 않으냐는 반론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런 기록은 젊은 신예들이 오히려 포인트 위주의 바둑을 선호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계산력은 대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절정을 보인다. 이창호 9단은 이 무렵 중반에 반집 승부를 내다보는 무시무시한 계산력을 보여줬고 대개 계가로 이겼다. 전투에 강한 것으로 알려진 신예들이 오히려 계산력으로 승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편 조훈현 9단도 KO 승률이 10%를 약간 넘는 정도여서 '전신(戰神)'이란 사나운 별명과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다승 1위를 달리고 있는 박정상 5단은 아홉 번의 불계승으로 KO율 10위에 턱걸이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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