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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풀 상호의존의 함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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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6자회담의 재개가 결정되면서 이번 4차 회담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들이 나온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은 북핵 문제와 같이 복잡하고 14년 이상을 끌어온 장기 난제를 다루는 회담에는 적절치 않다. 이번 회담에서 북핵이 결말나지 않는다 해서 마치 극단적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도, 그런 느낌을 주어서도 안 된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6자회담 재개 발표 전까지 미국과 북한은 아주 낮은 수준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룩했다고 한다.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의 김계관 사이의 베이징 비밀회동에서는 6자회담 복귀 날짜에 대한 합의까지 이룩했고, 뉴욕.베이징의 협상을 통해선 회담이 재개된다면 3차 때와는 다른 진전된 안이 상대방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제는 이러한 인식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수준에서라도 상호 간 신뢰의 구조를 만들어내 북핵 해법의 실질적 진전을 이룩하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인식의 전환이 이룩되면 나머지는 기술적 문제라는 낮은 수준의 난제로 내려가게 된다.

역사적 사례를 보자. 1985년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핵탄두가 미 워싱턴 등을 겨냥하지 않도록 입력 좌표를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미국인들은 브레즈네프 때보다 좀 더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때의 소련엔 브레즈네프 때와 똑같은 수의 핵무기가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민이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은 소련에 대한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소련 핵무기는 미국인들에게는 프랑스나 영국의 핵무기처럼 미국 땅을 강타할 이유가 없는 핵무기가 됐고, 유럽인들에겐 유럽 땅을 강타할 위협이 없는 미국의 핵무기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무기 숫자의 변화가 아닌 외교정책, 철학의 변화를 가지고 소련의 의도나 소련의 대(對)서방 적대감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북핵 문제의 해결도 이런 인식(perception)의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동맹이자 북한과는 동족인 한국은 북.미 양국의 서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미국은 라이스 국무장관-힐 아태차관보로 연결되는 협상론자들이 북핵을 다루는 데서 과거와는 다른 태도 변화의 조짐을 준다. 북한도 개방을 점점 확대해 나가면서 핵 해결의 노력을 확대하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발전돼 양국에 대한 서로의 인식을 변화시켜 정책 변화를 초래할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고취하는 것은 한국과 주변국의 임무다.

북핵 문제는 한민족에게는 총과 빵 모두가 등장하는 문제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뒤 남북한 모두 경제가 국제정치.안보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 동시에 안보가 경제를 보장하는 구조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동북아 전체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성이 강하고 성장하는 한.중.일 경제권에 러시아의 극동과 북한이 동참해 큰 틀의 파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러한 비전이 북핵에 의해 발목을 잡히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현 상황에서 상호의존의 이익을 이해해야만 한다. 비록 상호의존에는 제로섬과 비제로섬의 요소가 모두 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외교의 능력이다.

인접국가는 항상 상대방 국가가 강력한 힘을 얻지 못하는 방향의 정책만을 추구할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프랑스와 독일의 정치인들은 자국의 경제상황 개선만이 아닌 상대방 국가의 경제 여건 개선에도 관심이 높다. 프랑스 경제와 독일 경제의 상호의존의 이익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1890년대의 프랑스-독일 관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동북아에도 이런 상호의존의 이익이 존재한다.

다가오는 6자회담, 그 틀에서 북한은 북한에 대한 세계와 주변국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핵 무기고의 증강이 아닌 인식의 변화를 통해 북한의 안전과 번영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