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43. 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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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MBC '웃으면 복이와요' 공개녹화 무대에서 특유의 '개다리춤'을 추고 있는 필자.

MBC-TV가 개국한 지 며칠 뒤였다. 김완율씨가 허겁지겁 숙소로 달려왔다. "빨리 가자고. 뭘 꾸물거려." 영문도 모른 채 따라나섰다. "무슨 일인데." "글쎄, MBC에서 '그리운 쇼'를 연출하는 차재영 PD 알지. 자넬 사회자로 쓰겠다는구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는 MBC 앞 다방으로 갔다. "어, 배삼룡씨 아니오." 누가 아는 체 했다. "누구시더라…." 그는 나를 자기 자리로 데려갔다. 알고 보니 김경태 PD였다. 그는 나중에 '웃으면 복이와요'로 스타급 PD가 됐다.

"평소 배삼룡씨 연기를 좋아했습니다. 주간 코미디극을 만들려고 하는데 출연해 주시겠어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때 차재영 PD가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두 사람은 합의했다. 코미디언에겐 쇼 프로의 사회자보다 코미디극이 더 낫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게 됐다. 첫 배역은 집배원이었다. 한창 도배를 하고 있는 구봉서씨 집에 찾아가 "편지 왔습니다"라고 한 뒤 돌아서는 단역이었다. 배역이 너무 싱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애드리브를 더했다. "편지 왔습니다"하고 들어서다가 바닥에 있는 도배지를 밟고 휘청거린 뒤 '콰당'하고 넘어졌다. 방청객들은 박장대소했다. 다시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편지 여기 있습니다"하고 비실비실 걸어나오다 또 넘어졌다. 더 큰 웃음이 터졌다.

그때부터 넘어지는 배역이 단골로 떨어졌다. TV에 나온 지 한 달여 만에 '배삼룡'이란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코미디는 마이크 앞에서 두 사람이 유머를 주고받는 대화극이었다. 대본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임기응변에 의존했다. 코미디 작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방송은 달랐다. 프린트물로 대본을 만들어 정확하게 연습해야 했다. 작가가 없어 고민하던 김경태 PD는 "시험 삼아 써보라"며 내게 대본을 부탁했다. 유랑극단 시절 직접 대본을 썼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매주 서너 꼭지씩 가져가면 어김없이 방송을 탔다. 덕분에 출연료 외에 원고료까지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녹화하는 수요일마다 방송국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출연료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돈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웃으면 복이와요'는 회당 출연료가 8500원이었다. 쌀 한 가마 값이었다. 그러나 5000원 이상을 빚쟁이들이 가져갔다. 그러다 차재영 PD가 '쇼 반세기'란 프로에 나를 캐스팅했다. 1930년대 유랑극단의 애환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쇼 반세기'의 회당 출연료는 1만5000원이었다. 일일시트콤 '부부 만세'에도 출연했다. 이제 한 주 수입이 2만7000원에 달했다.

그제야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온양 처가에 내려가 있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왔다. 그동안 참아준 아내가 더없이 고마웠다. 빚도 거의 다 갚아가고 있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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