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기업 정서' 위험 수위] (4) 지나친 평등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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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부자는 마음이 악한 사람들이라는데 동의하느냐."

한.중.일 3개국 국민에게 다소 유치하다 싶은 질문을 던졌더니 한국 인은 1백명 중 36명(35.7%)이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렇지 않다'(62.6%)는 응답보다 적었지만 "매우 충격적인 결과"(서울대 최종원 교수)라는 반응이다.

반면 일본 국민은 25%, 중국인들은 17.4%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부자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정도로 부자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는 얘기다.

국민대 박상준(경영학)교수는 "어린이들이 읽는 만화에서 부자와 기업인들은 '냉혈한' '구두쇠'등으로 묘사되고 있다"면서 "이 때문인지 부자는 탈세와 부정을 일삼는 집단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부자를 인정 못하겠다"=자동차 매니어인 회사원 박모(35)씨는 외제 승용차를 갖고 있지만 출근할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회사원이 외제차를 몰고 다니느냐'는 주변의 시선 때문이다.

중소 의류업체 사장인 김모(44)씨는 외제차를 타고 싶은데도 국산 대형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납품하는 대기업 관계자에게서 '돈이 많군. 납품가를 조정해야겠어'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서다.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는 지적이 많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거나, 기업인은 비도덕적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서다.

중앙일보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부자는 열심히 일한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응답한 한국 국민은 1백명중 49명(48.6%)으로 일본(47%).중국(40.2%)보다 많았다.

따라서 부자들의 씀씀이에도 비판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차 구입은 비난받을 행위'라는데 한국 국민은 43.6%나 동의했다.

수입차공업협회 윤대성 전무는 "수입차 구입을 '좋다, 나쁘다'라는 이분법으로 볼 게 아니라 국산차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경제논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업 오너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은 사회적 책임 의식 부족(64.9%)과 도덕성 부족(28.2%)을 주로 꼽았다.

오너의 경영능력 부족(6.0%)보다 약자에 대한 배려 부족을 비판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중국인들은 경영능력 부족(29.9%)을 책임의식 부족(46.6%)에 이어 둘째로 꼽았다.

윤정호 디지털지노믹스 대표는"국민이 대체로 부자에 대해 '구린 데가 있다'는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다"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어야 사람들이 눈치 안 보고 재산을 불리거나 돈을 쓸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최종원 교수는 "부자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정적이라면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라면서 "도둑(부자)이 될 것이냐, 가난뱅이가 될 것이냐가 그것이다"고 말했다.

◇"상속도 곤란하다"=상속에 대한 거부감도 매우 높다. '상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국인은 1백명 중 71명(70.6%)이 '거부감이 있다'고 대답했다. 일본(72%)보다 거부감이 약간 덜하지만 중국(60.2%)보다는 강했다.

이는 가족 경영을 한국 기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국민 의식과도 연관이 있다. 창업자와 관련, 89.2%가 '정경유착으로 기업을 일으켰다'고 보면서도 80.5%가 '창업자들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답변했다.

창업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더라도 공로는 인정하지만, 상속을 통한 2세 경영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부자와 상속에 대한 반감이 이처럼 높은 데 대해 대개 세금 문제를 든다. 회사원 이녕근씨(35)는 "재벌들이 상속할 때 세금을 제대로 안 낸다"면서 "세금을 잘 낸다면 왜 싫어하겠는가"고 반문했다.

그러나 1백명 중 33명(32.6%)이 '법대로 상속세를 다 내더라도 상속은 절대 안된다'고 응답했다. 반감이 세금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81.2%가 '오너 재산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답변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반면 중국은 부자를 인정하는 만큼 재산 처리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사회 환원(52.2%)이 더 많지만 '개인의 자유 의사에 맡겨야 한다'는 답변도 42.2%로 한국(18.4%)보다 배 이상 높았다.

'재벌과 부자는 으레 그렇지'라는 막연한 반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벌의 상속에 거부감이 매우 높은 국민이 중소기업에 대해선 '거부감을 느낀다'(49.4%)보다 '거부감이 없다'(50.5%)가 더 높았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원장대행은 "변칙상속 등은 중소기업이 더 심할텐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큰 것'에 대한 반감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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