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안 듣고 질문만 … 나도 저랬나 싶어 얼굴 화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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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회의원일 때도 저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질문만 쏟아내고 답변은 듣지 않는 국정감사는 비생산과 비효율의 극치다.”

 올해 피감기관인 공기업 대표 자격으로 국감을 경험한 한 전직 의원의 토로다. 과거엔 추궁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추궁당하는 신분이 된 전 의원들은 한결같이 “제발 답변할 시간을 달라”고 호소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역지사지(易地思之)’ 상황에 놓인 것이다.

 전직 의원 출신으로 이번 국감에서 피감기관석에 앉았던 이들은 20여 명에 이른다. 공기업 사장과 공공기관장, 시·도지사 등이다. 국정감사장의 ‘갑’에서 ‘을’로 바뀐 이들도 후환을 두려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의원 출신인데도 익명을 요구했다.

 18대 의원을 지낸 한 공공기관장은 이번 국감을 ‘일방통행 국감’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나도 의원을 해 봤는데, 무조건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태도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쏟아내는 데다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는 통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대 국회에 다시 들어가면 피감기관에 소명 기회를 충분히 줘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주장했다.

 반복되는 질문과 의원들의 준비 부족을 꼬집는 이도 있었다. 국회에서 행정기관으로 옮긴 전직 의원은 “10여 명의 의원이 연이어 똑같은 질문을 하는 바람에 나중엔 대답할 기운조차 없더라”며 “매년 똑같은 질문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묻는 걸 보면서 ‘너무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지적했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2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일부 의원의 지적을 받고 곧바로 TF팀을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의원들이 업무의 줄기를 잘 파악하고 있어 놀랐다. 행정과 입법의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직 의원들은 하나같이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18대 의원이었던 박영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나도 의원 땐 시간이 아까워 답변자에게 인색하게 굴었다”며 “결국 짧은 기간에 수백 개의 기관을 감사하는 식이 아닌,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감사하는 제도로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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