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 없는「눈치작전」…과거「입시지옥」보다 뭐가 더 나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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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또 대학입시철이 다가왔다. 해마다 계절병을 앓듯 입시철, 특히 요즈음처럼 대학입시철이 다가오면 우리 사회는 한바탕 진통을 겪는다. 올해도 그 계절병은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그 양상이 사뭇 심화되어 기이한 현상을 빚고있다.
이른바「눈치작전」이라는 것인데, 이모저모로 지난해 보다 훨씬 치열한 열전이 예상되고 있다. 교사·가족·친지들을 모두 동원하는, 말하자면 보다 체계화된, 차라리 숙달된 기량으로까지 발전하고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학력고사성적을 근거로 하는 전형망을 뚫고 들어가자는 것일테지….
이쯤 되고 보면 이「눈치작전」이라는 것이 지난날의 입시지옥과 견주어 볼 때 과연 진일 보의 경지인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항간에는 옛말에『힘껏 해보고 하늘 뜻을 따르라』(진인정이대천명)고 했으니, 차라리 입학시험을 치러서 합격·불합격을 판가름하는 편이 속이라도 풀리겠다는 주장이 다시 들려오기까지 한다.
종전의 시험제도가 그 나름대로의 폐단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폐지된 입시이며 개선된 전형방법이 내신제도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이제 대학에로의 관문은 아직까지 온갖 사회악의 요람으로 되어있던 과외를 폐지한 것이니까 이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까. 실력은 차치해 놓고 그저 약삭빠르게 눈치씨름으로만 치닫는 입시풍토를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해야하는 것일까. 개성을 살리고, 적성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인 대학으로 진학하는 보다 합리적이고 납득할만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대학입시를 둘러싼 이모든 문제들이 근본적으로는 우리 한국인의 사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악순환의 요인이나 해결책을 사회나 정부시책의 탓으로 돌리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태도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개성하고 주체성 없는 삶의 태도가 우리가 당면한 다른 모든 문제의 경우와 같이 대학입학문제에도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의사는 생활이 안정되니까」하면서 의대를 만년인기대학으로, 엔지니어가 취직이 잘되던 시절엔 공대에 몰렸고, 상사인의 인기가 높아지자 상대가 판을 친다. 소질과 능력과는 상관없이 졸업 후 무조건 취직 잘되고 돈 잘버는 곳이 일류대학, 일류과가 된다.
내 전공분야인 음악만 해도 그렇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뒤에 숨은 부모들의 무지와 자주 부닥친다. 자녀들의 소질이나 음악의 본래의 뜻 같은 건 아랑곳없이 결혼지참금이라도 들려주듯 음악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이 허다하다. 주로 딸에게 악기를 전공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결혼의 조건으로 간주된다는건 웃지 못할 희비극이다.
놀라운 것은 당사자들이 아무런 반감 없이 무모의 그런 생각을 좇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뜨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택한 전공이 소중할리 없고 학교에 들어와서도 재대로 음악을 할리 없다. 나아가 대학가의 혼잡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정말 그래서 무방할 것인가.
음악교육의 경우는 또 한가지 슬픈 사실이 있다. 음악이란 정말 좋아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련만 많은 사람들이 시작부터 남을 이기기 위해, 그러니까 우승컵 쟁탈전에 참가하는 식으로 출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 가르치는 입장에서 잔뜩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는 일만도 큰일거리다. 따라서 음악다운 음악의 참맛을 즐긴다든지, 나누어 갖는다든지 하는 건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공대·문리대·법대·의대·음대 어느 대학이든지 정말 자신이 하고 싶고 능력이 있는 경우에만 진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을 가는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교사·사회는 그들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왜 모두가 대학을 가야만 하는 것일까. 왜 모두가 남의 가치판단에 맞춰 단 한번뿐인 나의 삶을 살아야한단 말인가.
과도기란 개인이나 사회가 스스로의 차원을 높이려고 발돋움할 때 자신의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거듭되는 과도기적 시행착오가 환영할만한 것은 되지 못할지언정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함정은 거기에 있다. 문제의 근원을 꿰뚫는 철저한 성찰 없이 언제까지나 타율적인 외부조건에만 매달리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애당초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자의식의 공백은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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