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복의 굴레」서 벗어났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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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급속히 변천하는 문명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에 역류할 수 없는 오늘의 세태에 잘 어울리는 적절한 속담이 아닌가 한다.
신년 새해아침.
내년부터 중-고등학생 교복의 자율화라는 뉴스를 듣고 이 말을 생각했으며, 또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는 청소년들의 작은 자유 속에서 흔히 말하던 일제시대 마지막 잔해의 냄새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며칠 전 딸의 교복자율화로 인해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게 됐다고 근심하시던 형님의 얼굴과 그 곁에서 대조적으로 그로 인해 그동안 침체되었던 시장 경기가 다시 회복되는 좋은 징조가 아니겠느냐고 즐거워하던 조카의 얼굴도 떠올랐다.
내가 교복을 입었던 시절은 6.25의 민족적인 비극을 겪은 가난한 국가경제 속에서 재건의 소리가 한창이던 시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들은 동복과 하복 두벌의 제복으로 1년을 지냈었다.
그래서 더운 초여름에는 두껍고 무거운 겨울옷을 입고 땀내 나는 끈끈한 오후의 수업을 해야 했고, 또 초가을 쌀쌀한 이른 아침의 등교 길은 1백80도의 널따란 플레어 스커트 밑의 썰렁한 맨살종아리와 함께 얇은 천의 반 팔 여름 윗도리 속에서 한기에 떨면서 가는 팔뚝을 번갈아 비벼 가며 걸어야 했던 괴로운 발길이기도 했었다.
그리나 지금은 그때와 모든 상황이 달라졌고 국민소득도 급속도로 높아져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
이러한 오늘, 학생들의 교복자율화가 시행된다는 소식을 우리는 흥분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겠다.
엊그제 조카의 기뻐하던 얼굴이 침체된 시장이 회복될 것이라는 의젓한 예측에서 비롯된 즐거움보다 그들을 얽어 놓았던 불편한 제복의 구속에서 풀려난다는 자유스런 해방의 감정이었음을 나는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교복의 자율화로 인해 들뜬 소수 학생들의 마음이 행여 방종과 탈선을 부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의 소리가 각처에서 들리고 있다.
언제나 모든 과도기적인 상태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문제성을 학생·학부모·선생님, 그리고 사회가 다같이 노력해서 극복해 나가야 될 것이다.
국민학교 어린아이들의 옷값이 어른의 옷보다 몇 갑절 비쌀 수 있는 유명상표의 횡포가 과연 누구 때문이라고 탓할 수 있을지 지각 있는 주부들은 부끄러워한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상이 있듯이 학생도 그들의 신분에 맞는 소박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선명한 색깔로 남아 있다.
새해아침 교복의 자율화라는 반가운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맞는 값싸고 질긴 좋은 질감의 개성 있는 편한 자세의 옷을 입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자기가 바라는 인물이 되어야지 결코 모양이나 맵시에 끌려 다니는 의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복자<서울 강남구 반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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