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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성장서 고용 늘리는 성장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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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말이 전 세계적 화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와 환경 얘기만 나오면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환경을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으레 튀어나온다. 이런 주장은 경제와 환경이 상충관계에 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경제와 환경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가 고효율.저비용 사회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저효율.고비용 사회임은 IMF 외환위기 이후 누누이 지적돼 왔다. 낭비와 저효율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것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경제 성장과 환경 보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는 덮어 두자. 좀 더 근원적으로, 환경의 시대에 환경을 희생해 가면서 경제 성장을 추구해야 할 만큼 경제 성장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인지도 이제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경제 성장은 우리에게 큰 복음이었다. 1인당 소득 수준을 높임으로써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줬고,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 줬으며, 빈부 격차를 줄임으로써 사회통합을 가져다 줬다. 그래서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에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온 국민이 똘똘 뭉쳐 경제 기적을 이뤘다.

그러나 시대는 많이 변했다. 오늘날 무한경쟁시대의 경제 성장은 우리에게 그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간 다음부터는 절대적 소득 수준보다는 상대적 소득 수준이 행복에 결정적 요인이 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소득 수준에 비해 내 소득 수준이 어떠한지가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성장으로 모든 사람의 소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다고 해서 모두 더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통계적으로 밝혀졌다.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 국민 대부분은 20~30년 전에 비해 더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국민 중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미국보다는 인도에서 오히려 더 높다.

오늘날 무한경쟁시대의 경제 성장은 일자리를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감소시키면서 이뤄진다. 1970년에는 1억원의 국내총생산 증가에 투입되는 고용인원(취업계수)이 20명이었지만 2003년에는 2명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의 2003년 매출액은 97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고용은 오히려 4% 감소했다. 이런 취업계수 감소가 우리나라 실업률 증가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소득 일자리는 늘어나는데 저소득 일자리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소득계층 상위 30%의 일자리는 늘어나는데 하위 30%의 일자리는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빈부 격차는 계속 커지고 있다. 이 빈부 격차는 우리 사회에 양극화 현상을 낳았으며 사회 통합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같이 오늘날의 경제 성장이 우리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주지도 못하고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하며 사회 통합을 일궈내지도 못한다는 게 명백해지고 있음에도 아직 많은 사람이 맹목적으로 경제 성장을 열망하고 있다.

오죽하면 '국민소득 2만 달러'가 국정 목표가 되고 있겠는가? 이제는 그저 안일하게 '성장이 곧 고용이요, 분배'라는 낭만시대의 케케묵은 도식을 되뇌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현실 여건상 경제 성장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2만 달러'라는 숫자를 지향하는 경제 성장이 아니라 '고용과 환경'을 지향하는 경제 성장으로 우리의 갈 길을 바꿔야 한다. 이미 유럽 선진국들은 이런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 우리 정부는 틈만 나면 환경 보전과 경제 성장의 조화를 부르짖었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성장을 강조해 왔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경제 성장은 환경 파괴적이었고 실업은 줄지 않고 있다. 환경의 날을 맞아 경제 성장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이제는 실질적으로 고용과 환경을 지향하는 경제 성장, 즉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이정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