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움, 그 풀리지 않는 화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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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37기 왕위전 본선리그 제2국
[총보 (1~162)]
白·趙漢乘 6단 | 黑·柳才馨 6단

바둑이란 두터움을 이해하는 일이다. 두터움은 몇겹의 중복이나 콘크리트의 견고함이 아니다.

실리가 부족해 허덕인다면 그것 역시 두터움이 아니다. 두터움 속엔 실리가 숨어있다.

두터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부풀어오른다는 느낌을 준다. 탄력과 능률, 그리고 공격받지 않는 모습에서도 두터움이 묻어나온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두터움인가. 이창호9단과 같은 절정의 고수들도 이 화두를 아직 풀어내지 못했다.

이 판은 초반에 묘한 장면이 나왔다. 백의 조한승6단이 '참고도' 1로 허공(?)에 두자 흑의 유재형6단은 2로 상변 백진에 파고들어 선수로 깨버린 뒤 12까지 또다시 실속을 챙겼다(실전 32~43의 수순).

흑의 속력행마에 백은 가죽만 남은 듯한 인상이었다. 백은 두텁기는 하지만 너무 느려서 심한 실리부족증에 허덕일 듯 보였다.

그러나 김수장9단이나 임선근9단은 이 같은 상변 침투에 대해 다른 말을 했다.

"집은 무너뜨렸지만 이 흑은 미생이다.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다."

죽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쉽게 쫓길 돌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그래도 미생이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

그것을 가리켜 프로들은 "엷다"고 말한다. 실리를 추구하는 빠른 행마에는 운명적으로 이 같은 엷음이 따라다닌다.

그들은 또 말했다.

"이 대목에서 선악을 말할 수는 없다. 차후의 운영이 문제다."

이 판은 중반 이후 121의 가벼운 한수가 122의 통렬한 반격에 휘말리면서 그 여파로 상변에 침투했던 흑 대마가 죽어버린다.

살 수 있었지만 피치못할 사연 끝에 사망하고 만다. 결국 "부담이 될 것이다"는 예언이 적중했다.

그러나 121의 실수가 없었다면 부담은 그저 부담으로 끝나고 말았을지 모른다. 원점으로 돌아가 33~43까지의 수순은 선악을 논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됐다.

바둑의 대부분은 이렇게 안개 속에 가려 있다. 무엇이 진정한 두터움인가. 이 화두는 영영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162수 끝, 백 불계승.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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