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어느 어르신의 유별난 손녀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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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아들 만나러 미국에 갔다가 혼쭐난 할머니가 있다.

 1970년대 말. 지금은 이주여성도 많고 외국인노동자도 주위에 많아 외국사람 외모가 그리 낯설지 않지만, 그 당시엔 어쩌다 마주친 미8군 군인을 보고도 무척 신기해하던 시절이다. 눈앞에, 코도 뾰족하고 눈도 왕방울만 한 미국 여자아기를 본 그 할머니. ‘인형같이 예쁘다. 한번 안아보자’고 했다가 이웃이 신고한 경찰에게 딱 걸려버렸다. 문화 차이로 생긴 실수라며 그녀의 아들이 한참을 설명한 후에 할머니는 간신히 풀려났다. 그때는, 좀 유별난 것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 후 35년이란 세월이 지난 바로 며칠 전. 골프장 캐디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가 구설수에 오른, 일흔을 한참 넘긴 모 정치인. 캐디 말에 의하면 ‘뒤에서 껴안고 카트에서 허벅지도 만졌다’고 하지만, 본인은 ‘손녀 같고 예뻐서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을 뿐이지 성희롱은 아니다’라고 변명하던데. 자세한 수사결과야 곧 나오겠지만 차라리 변명하지 말걸 그랬다.

 걸핏하면 ‘고추 얼마나 컸는지 보자’며 짓궂게 어린 남자아이 바지 속에 손을 쑥 집어넣던, 옛날 부모님 시대도 아닌데, 아무리 손녀라 할지라도 할아버지가 23살이나 먹은 손녀딸 가슴을 만진다고? 높은 자리까지 앉았다는 분이 세상 변한 걸 그리 모른다는 건가. ‘그가 무죄로 나온다면, 난 대한민국 여자 국회의원들 가슴을 모조리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다닐 게다. 그래도 난 무죄일 테니’란 네티즌 댓글. 읽고 웃어넘기기엔 입맛이 좀 쓰더라.

 과거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죄가 되는 성희롱. 행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죄가 된다. 다소 애매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느꼈을 감정이 기준이라니, 보통사람이라면 납득 가능하고 죄도 충분히 피해갈 수 있을 거다.

 지난 18일, 진료인지 성희롱인지 아리송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권위에서, 병원 진료 과정에서 환자가 당할 수 있는 성희롱의 유형과 판단 기준, 예방법 등을 담은 ‘진료 과정 성희롱 예방 안내서’를 펴냈다. ‘허리 치료하는데 속옷을 엉덩이까지 내리거나, 물리치료 시 여성 환자 뒤에서 끌어안아 치료할 때’ 등이 사례로 적시됐다 한다.

 이젠 ‘골프장 성희롱 예방 안내서’도 필요하게 생겼다. 그나저나. 직장 잃을 걸 뻔히 알면서도 신고한 그 캐디의 그 용기. 세상은 그런 용감한 사람들에 의해 바뀌는 거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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