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고구마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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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 마을 밭농사로는 고구마 농사만한 게 없습니다. 한 해 살림을 좌우하는 농사다보니 고구마 심는 날은 여럿이 밭에 모여 야단을 떱니다. 고구마를 심고 나면 빨리 자라라고 비닐을 덮어두는데, 순이 많이 자라 비닐을 걷은 집이 대부분입니다. 밭을 맡긴 친구가 벌써부터 고구마를 심어달라는데 고구마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지난 해 태풍으로 고구마 농사를 망친 집이 많아서죠. 며칠 전에야 친구가 와서 간신히 씨고구마를 구해 놓고 어머니 병간호하러 갔습니다.

오늘 친구네 밭에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갈아놓은 밭에 혼자 가서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친구네 겨울 양식을 마련하는 일인데 조용히 할 수 있어야지요.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어젖혔습니다. 일부러 큰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어깨춤도 추면서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지렁이를 만나면 지렁이 옆구리를 간질이고 나비를 만나면 온 밭을 쿵쾅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 다른 고구마보다 늦게 묻히긴 했지만 어느 고구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걸 고구마들이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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