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 기자는 고은맘] 세탁기 속에서 나온 기저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반응했을 만한. 제가 어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집안일이란 게 참 그렇더군요. 해도 티는 안 나는데 안 하면 표가 확 납니다. 껌딱지 고은양과 붙어 있다 보면 집안일은 쌓여만 갑니다. 어제 아침엔 그렇게 하루 이틀 쌓아뒀던 세탁물을 한꺼번에 처리했습니다. 세탁기가 꽤 큰 용량인데도 터질 것처럼 세탁물을 밀어넣었습니다. 겨우 세탁기를 돌리고 고은양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일이 좀 있어서요.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고은양과 외출하고 돌아오면 삭신이 쑤십니다. 유모차를 가지고 간다 해도 갑자기 타지 않겠다고 강력히 저항하며 울어제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안아야 합니다. 이제는 10kg 가까이 나가는 고은양을. 그러니 카이로프락틱을 다니며 어깨와 척추를 바로 펴는 치료를 받으면 뭐합니까. 다시 어깨는 구부정, 척추는 휘는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 제 품에서 잠든 고은양을 내려 놓으니 고은양 짜증이 하늘을 찌릅니다. 혼자 앉기 싫다며 우는데 어쩝니까. 저도 힘든데. 우는 고은양에게 과자를 쥐어 주는 울음을 그칩니다. 과자는 웬만하면 안 먹이려 했건만... 육아란 그냥 하나 둘 타협하는 건가 봅니다.

한숨 돌리다 보니 빨래 생각이 났습니다. 고은양이 과자 먹느라 정신 없을 때 널어야 수월합니다. 세탁기 문을 열고 다 된 빨래를 꺼내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세탁이 끝난 빨래에 뭔가 하얀 알갱이 같은 게 묻어 있습니다.

처음엔 휴지인가 싶었습니다. 휴지를 주머니에 넣고 세탁기를 돌린 경험이 몇 번 있어서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 휴지를 세탁기에 돌렸을 때 일어나는 참사와는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계속 이어 빨래를 더 꺼내는데 하얀 뭉치가 쑥 나왔습니다.

기저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세탁기 안에 들어간 건지 모르겠지만 세탁기 안에는 기저귀가 있었습니다. 한 번 사용한 것인지, 새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기저귀가 있었습니다. 기저귀는 물을 한껏 머금어 탱탱 불어 있었고, 기저귀 충전제(?)로 보이는 하얀 알갱이는 세탁물과 세탁통 전체에 꼼꼼하게 붙어 있더군요.

빨래를 탁탁 털면서 충전제를 떼어내는데, 이게 잘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털어도 털어도 뭔가 남은 듯 찝찝하고. 일일이 빨래를 털고 있는데 과자를 다 먹은 고은양이 광속도로 제게 기어옵니다. 제가 그렇게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건만, 고은양은 아는지 모르는지 매번 베란다 밖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지저분한 베란다 바닥에 손을 대 놓곤 금세 그 손가락을 빱니다. ”지~지“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번에도 베란다 쪽으로 손을 뻗길래 못하게 방 안 안쪽으로 옮겨 놨더니 아파트 떠나가라 울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뭔가 너무 서러운 겁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빨래를 털면서요. 잘 떨어지지 않는 충전제를 털어내면서요.

전에도 뭔가 덜렁대고 잊어버리고 한 적은 많습니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 후에 증상이 더 심해진 것 같았습니다. 외출하면서도 뭔가 하나씩은 꼭 빠트리고요. 식당에는 꼭 뭘 놓고 나오고요(어제도 점심 때 고은양 숟가락을 식당에 두고 왔습니다ㅠ). 그런데 이제는 하다 하다 세탁기 안에 기저귀를 넣다니...(위안이라면 그 기저귀가 똥기저귀는 아니라는 거ㅠ)

바보가 된 것 같았습니다. 한심한 제가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고은양은 울음을 그치고 저를 빤히 보더니 되레 배시시 웃습니다. 아직 엄마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아니면 잘 이해하는 건가? 그렇게 웃는 고은양을 보니 하도 어이없어 저도 울음을 그치긴 했습니다).

이제 뭔가 육아가 자신 있다 싶었는데 아직은 멀었습니다. 그간 숨죽여왔던 감정선이 세탁기 속 기저귀에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한바탕 울고 나니 헛헛합니다.

육아의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ps. 어제 하필, 남편은 야근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고란 기자

[사진설명]

1) 문화센터 수업중. 초집중하고 있는 고은양.
2) 할머니집에서 숙면중. 잘 때가 제일 예쁜(^^) 고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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