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아버지와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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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창 밖을 보니 아들이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겠다며 마당으로 장기판을 들고 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수학 선생이었던 할아버지는 깐깐하게 장기를 가르쳤습니다. 장기를 두러나간 아들은 할아버지만 멀뚱멀뚱 쳐다보았지요.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아들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아버지가 쓸쓸해 보여 마당으로 갔습니다.

제가 아들만 할 때 아버지에게서 바둑을 배웠습니다. 바둑판에 새카맣게 검은 돌을 깔아도 상대가 되지 않았지요. "아부지, 한판 두실랍니꺼?" 아버지가 된 아들과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가 장기판을 두고 앉았습니다. 칠순 가까운 아버지, 정정하고 당당해서 여전히 목청을 드높이는 아버지가 어이없는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백발에 돋보기를 쓴 모습이 오히려 멋으로 보이던 아버지 역시 나이를 속일 순 없나 봅니다. 가족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의 힘겨웠던 세월에 보답할 방법이 별로 없는 가난한 아들은 착잡했습니다. 39년만에 처음으로 장기에서 아버지를 이겼습니다. 져 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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