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송금 '정부서 주도' 주장

중앙일보

입력

대북 송금 의혹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사건에 대한 특검 수사를 앞두고 다시 '외압론'을 제기했다.

金씨는 2000년 6월 송금 당시 현대상선은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좌를 빌려줬을 뿐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최근 미국에서 만난 한 측근에게 밝힌 내용은 이렇다. "나는 당시 왜 우리 현대상선 계좌를 이용하려 하느냐면서 끝까지 버텼다. 그런데 청와대와 국정원에서 전화해 '계좌만 쓰는 건데 왜 그러느냐'고 말했다."

송금은 애당초 정부가 주도했고 현대, 특히 현대상선은 마지못해 따랐다는 요지다.

지난 2월 김대중 (金大中) 전 대통령의 사건 관련 대국민 담화 때 배석했던 박지원 (朴智元)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임동원 (林東源) 전 국정원장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당시 이들은 현대 측이 대북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5억달러를 제공키로 하고 철도.전력.개성공단 등 7대 사업권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남북 간 평화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환전 등의 과정에 편의를 제공했다는 거였다.

따라서 金씨의 이번 주장은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뜨거운 쟁점이 될 전망이다. 金씨는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이뤄진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대북 송금은)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뤄진 일이며, 나는 대출 서류에 사인한 적도 없다. 때가 되면 밝힐 것"이라고 다른 말을 했다. 이어 이번에도 측근에게 "진실을 얘기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재차 밝혀 특검 수사에 응할 것임을 시사했다.

실제로 金씨는 지난 16일 LA에서 이종왕(李鐘旺.김&장 법률사무소)변호사와 만나 특검 수사 대책을 숙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李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현대상선 및 金씨 변호인이며 지난 1월에도 미국에 가 金씨를 만났었다.

金씨는 그때 이미 李변호사에게 ▶후일을 대비해 대북 송금 영수증 원본과 복사본을 보관해 놓았으며▶실제 대북 송금액은 정부가 밝힌 5억달러보다 많을 것▶청와대의 고위 관계자(구체적인 실명까지 거론)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이번 회동에서 두 사람은 특검 수사에서 외압 부분을 입증할 변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金씨가 미리 준비해 놓은 자료나 당시 정황으로 입증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李변호사는 19일 귀국 직후 본지 기자와 만나 金씨와 대책을 논의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金씨의 외압론에 대해선 "변호사가 의뢰인의 진술을 흘리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특검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만 말했다.

金씨 측근과 李변호사 등의 전언을 종합해볼 때 특검 수사가 산업은행의 대출 적법성을 가리는 단계를 지나 현대상선 쪽으로 옮겨가는 시점에 金씨가 전격 귀국해 조사에 응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외압설의 실체가 드러날 것인지가 현재로서는 관심의 초점이다.

金씨가 당시 청와대.국정원 관계자들을 거명하고, 그들이 소환된다면 수사가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金씨는 현재 미국에서 외부와 거의 연락을 끊은 채 생활하고 있다. 그는 현대상선 최고 책임자로서 사업과 직접 관련없는 부분에 수천억원을 투자해 손실을 입혔다는 세간의 평가,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뒤집어쓸 배임 혐의를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金씨의 투자가 권력기관의 외압으로 어쩔 수 없이 이뤄졌다는 점이 인정될 경우 배임죄를 벗을 수도 있다.
조강수·전진배pinej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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