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일본 최고 작가의 뒤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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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신경쇠약 안 걸린 사람은 미친 인간들뿐 … 서둘러서는 안 되네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불꽃은 순간의 기억밖에 주지 않네”

우리가 유명한 사람의 사적인 편지를 읽는 첫번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실은, 내면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치사하고 소심한 범부(凡夫)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책으로 출판되는 이유는 거기에 일상이 숙성시킨 어떤 인간의 위대한 육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에도 그 얼굴이 나와 있는 일본 근대 최고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서간집은 그런 의미에서 이 두 가지 이유를 모두 충족시켜 준다.

부인에게 늦잠을 자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돈을 빌려달라는 후배에게 1엔이 있으니 그걸로 술이나 사먹으라고 하고, 인색한 친구가 자신의 글을 칭찬하자 기쁨을 숨기지 않는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자네 약한 말을 해서는 안 되네. 나도 약한 사람이지만 약한 대로 죽을 때까지 해보는 걸세. (중략) 죽는 것도 괜찮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여자의 동정이라도 얻어 죽을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좋겠지”라며 익살을 떠는 그는 그러나 일본 국비 유학생 1호로서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왠지 박사도 교수도 다 거절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나도 교토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대학 선생이 되어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놀러가고 싶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느낌이 좋고 유쾌한 곳보다 느낌이 나쁘고 유쾌한 일이 적은 곳에서 어디까지나 싸움을 하고 싶습니다. 이건 결코 오기가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는 보람이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중략)나는 세상을 일대 아수라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 속에 서서 장렬하게 죽든지 적을 굴복시키든지 어느 한 쪽은 해보고 싶습니다. 적이라는 것은 나의 주의, 나의 주장, 나의 취향으로 보아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 되지 않죠. 그래서 나는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하늘이 주신 재주를 다하고 죽는다는 위안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는 말하자면 그것이 취지의 문제이며 “교수나 박사가 되느냐는 사소한 문제입니다. 나쓰메 모라는 사람이 성장하느냐 움츠러드느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국립대학의 교수직도 내던지며 얼핏 이렇게 큰 호기를 지닌 그는 그러나 평생 신경쇠약으로 고생한다. “이 시대에 신경쇠약 안 걸린 사람은 미친 인간들뿐” 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저 “죽을 때까지 진보할 뿐”이라면서 그는 후배 작가에게 말한다.

“서둘러서는 안 되네. 머리를 너무 써서는 안 되네.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중략)불꽃은 순간의 기억밖에 주지 않네. 힘차게 죽을 때까지 밀고 나가는 걸세. 무엇을 미느냐고 묻는다면 말해주지. 인간을 미는 것일세.”

나쓰메 소세키는 좋은 쪽과 나쁜 쪽 모두를 아울러서 그 시대의 일본을, 그리고 어려운 시대의 초라한, 그러나 결국 한 시대를 밀고 간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렸다는 사실 또한 아주 상징적이다.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모든 시대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시대에 적응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대의 성장을 늦춘다. 다만 몇 사람의 진실된 인간만이 그 시대를 버티며 밀고 간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그 시대를 밀고 간 소가 된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사람을 그 비싼 1000엔짜리에 그려놓은 일본인에 대해 이럴 땐 하는 수 없이 부러움을 보낸다.

*** 공지영

1963년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88년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 대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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