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월 모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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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모월모일. 너와 내가 싸울때 네편도 되고 내편도 되는 사람이 아닌, 오직 네편만이 되는 사람이 내 속에 살고 있다. 너는 이 불공평성을 보고 「미안하다」에서 「미안할 것 없다」로 생각한다.
「미안하다」 때문에 살아오던 내가 「미안할 것 없다」 때문에 죽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을만큼 너는 너다와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도 나다와질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스스로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 길로 가는 길이라고 자꾸만 누가 내게 말한다.
모월 모일. 연결은 됩니다. 나무와 꽃, 가시와 담장이 사이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치는 풍경이 하나일땐 두개의 사과나무 사이에도 길은 생깁니다.
모월모일. 내가 죽은 후 네가 날 보고 싶다고 하면 네겐 머리는 없고 가슴 뿐이니까. 옆으로 눕는 일이 쉬운 일이면 전체를 바쳐 한번 누워도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모월 모일. 인간은 부서진 조각이 아니다. 단단히 뭉쳐진 얽힘이다. 소아마비를 앓은 아이의 다리같이 육신은 결국 흔들리지만 죽음 앞에 선 우리 인간의 마음은 철저히 얽혀진 골수에 사무치는 정적이다.
모월 모일. 배가 비어있을 때가 있고 배가 차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은 인간이 사는 조건이다. 비어있을 때는 음식을 찾고, 차있을 때는 놀이를 찾는다. 사랑은 차있어도 비어 있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이상의 것. 미움은 차있어도 비어있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이하의 것.
모월모일. 혼자서 부르는 노래는 잘 부를 필요가 없다. 노래 만드는 재미는 만들어진 노래를 부르는 재미보다 낫다. 소나무가 서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래도 나보다 훨씬 오래산다. 말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나도 너만큼 오래 사는가.
모월모일. 불행히도 나는 말을 배웠다. 사전속에 있는 말을 골라 바다 위에 풀어놓으면 고기들이 와서 주워먹고 아파한다.
모년 모월 모일. 튀근 후 집에 와서 마누라보고 소주 한잔 달라고 했을 때 저항없이, 아 정말 저항없이 한잔 주어서 받아먹을 수 있게 되면 나는 행복해진다. 너는 저쪽에 있으면 된다.
아무리 먼 저쪽에 있어도 된다. 마냥 행복해하며 너의 옆으로 너의 옆으로 나는 간다. 나는 해거름이 그만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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