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위 박사(서울적십자병원장)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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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금도 그렇지만 해방직후 인턴수업은 뼈를 깎는 고달픔이 뒤따랐다.
오전 중에는 외래환자 진료의 조수로 일하며 검사처리에 동분서주, 오후는 담당 입원환자 진료와 수술에 매달려야 했던 것이 해방직후 서울대병원의 인턴생활이었다.
전쟁으로 가뜩이나 부족한 실험도구는 부서지고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에 휴일이나 야간을 이용, 실험실 구석구석은 물론 약국창고 등을 샅샅이 뒤져 쓸만한 도구들을 주워 모아 연구실 차리기에 동료들끼리 서로 기를 쓰며 싸움질까지 할 정도였다.
적은 경비로 병원을 꾸려 나가자니 직원에 대한 처우가 충분할 리가 없었고 직원들 또한 응당한 보수를 바랄 수도 없었다.
무료로 봉사하는 무급조교가 태반이요 그것도 몇 년씩 계속되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우리 손으로 우리의 학교와 병원을 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직하는 밤이면 난방이 안된 차가운 방에서 외투를 입고 양말을 신은 채 미군담요 한 장을 돌돌 말아 덮은 채 밤을 지새기가 일쑤였다.
이러한 고난을 같이 넘은 선배·동료·후배들이 지금은 각대학과 병원을 이끌어 나가는 교수요, 학장이요, 원장들이다. 고난의 초년병 시절이었으나 내 인생에 값진 시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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