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北核협상, 일단 미국에 맡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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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부의 외교팀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북핵협상에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은 핵재처리 운운하며 우리를 흔들어대고 있다.

이처럼 석연치 않은 상황전개는 우리의 안보와 경제가 북한의 볼모가 된 구도에선 불가피하다. 또 민족공조와 한.미공조 가운데 하나를 택하기 어려운 정부로선 수용할 수밖에 없다.

북핵과 전쟁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입장이라면 미국마저 북측 주장대로 한국은 빼놓고 대화하겠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정치권과 언론이 정부의 외교역량을 탓한다. 그러나 무력충돌까지 불사하며 북 핵무장을 막으려는 단호한 의지가 없다면 허망한 넋두리다. 또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우리를 섭섭하게 하는 미국에 무턱대고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미군에 의존적인 국방태세를 바꾸라"고 지시했다면 문제의 원인만큼은 제대로 짚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주문도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반미와 반전을 동일시하며 외쳐대는 군중 앞에서 자주국방이 설 땅이 있을까 의문이다.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볼모로 삼은 북한에 자비를 기대하는 이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그런 군중이라면 미군철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마땅하다. 주한미군 재배치 얘기에 왜 불안해하며 미국은 왜 비난하는가. 정치권이나 언론이나 시민단체나 제발 우리 처지가 무엇인지, 또 과연 역량은 있는지 주제파악부터 해야 한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대북협상에 처음부터 한국을 꼭 끼워넣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미국식 북한 압박에 김빼기로 일관했다.

또 대승적 차원에서 북한과의 타협을 주장했다. 이런 한국이 참여한 다자회담에서 미국은 수세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보는 한국은 대북협상 결과 북측에 넘겨줄 보상을 맡길 상대로서 족하다.

이처럼 동맹과 동족에 무시당하면서도 충돌을 피하고 느긋하게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면 어떤 수모라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끼리 치고받는 자해행위는 안의 갈등만 키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북한을 다루는 데 있어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맡을 처지는 아직 아니다. 조속한 협상타결에 대한 기대도 금물이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북한과 전쟁할 생각이 없다. 그럴 형편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타협을 하기에 미국은 분열돼 있다. 미국 대선이 18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실제 대선전은 올해 말이면 시작된다. 1994년 북핵고비를 넘기는 데도 19개월이 걸렸다. 판을 한껏 키워놓은 북한 탓에 이번에는 더욱 힘들게 생겼다.

재선을 포기하더라도 '악의 축'을 무너뜨리겠다며 전쟁을 불사할 아둔한 부시가 아니다. 지난해 여름 북핵 정보를 통보받고서도 미 의회에서 이라크전 결의안이 통과될 때까지 12일간 쉬쉬했던 백악관이다.

이라크전 승리 선언 직후 부시 대통령은 미국 경제 재건을 천명했다. 10여년 전 아버지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재선이 확실해질 때까지 미국의 대북협상 전략은 시간끌기다.

이런 정황을 아는 북한은 핵재처리를 들먹이며 타협을 서두르고 있다. 반세기 동맹이었던 우리보다 북한의 미국 이해가 빠르다. 이제 우리가 대북협상에서 빠졌다고 서운해하는 것은 자학이다. 또 어설픈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고 판단한다면 타협 결과 비용을 부담할 자세를 갖추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입장부터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북한 아닌 미국을 우선 납득시킬 수 있는 논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은 우리 현실에 대한 냉엄한 인식을 요구한다.

또 국민에게 듣기 거북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대북협상은 일단 미국 손에 맡겨라. 안타깝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길정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