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속의 고기도 경칩 지내자 기지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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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계절을 잊고 사는 것이 도시인들의 습성이듯이 수년 동안 나 역시 봄을 거의 잊고 살아왔다. 하나 지난 겨울처럼 지독한 추위와 많은 눈이 내리고서야 어찌 겨울을 실감하지 않겠는가.
길고 지루한 겨울일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듯이 금년에는 우리들 소시민도 과연 대망의 봄을 기대해도 좋을 것인지….
지난 연초에는 많은 화우들이 찾아와 18년짜리 옥매의 개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고, 일전에는 후배들이 몰려와 난분들을 나누어 갔었다.
과연 저들이 냉수만 마시고 사는 난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빈자락도라고 하는 선비들의 길을 알고 갔는지, 아뭏든 내 작은 화실에는 9년째 꽃대를 보지 못한 한난 한 그루가 청초한 여인처럼 사랑스럽기만 하다.
경칩이 지나자 어항 속에 묻어두었던 연근으로부터 새순이 솟아오르고, 겨우내 땅바닥에서 뒹굴던 어족들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멀지 않아 봄비가 내릴 것이고 그때쯤이면 나는 남쪽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기차가 작은 역을 지날 때마다 나는 한발 한발 봄이 가까와졌음을 의식하게 되고, 참으로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듯 힘 것 기지개를 켜면서 봄의 햇살을 감지할 것이다.
이토록 내가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뜻은 백제와전에 새겨진 연화를 알고 나서부터다. 천년이란 간 세월을 흙에 묻혀서 영원한 개화의 의미를, 영원히 질줄 모르는 석화의 의미를 이제야 나도 알 것 같으니 말이다.
천년의 한 맺힌 절규를 들으며 새삼 옷 것을 여미어 본다. 개화의 소리가 온누리에 퍼질 때까지….
글·그림 오태학 <동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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