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대 파리 국제전서 첫 입선-이종우 선생의 작품 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종우 선생은 1898년 황해도 봉산의 부호의 자제로 태어났다.
평생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그의 재복은 결국 그의 환경 탓도 있지만 그의 예술과 낭만의 원천이 되었다.
1914년 동경으로 건너가서 동경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연구하고 1920년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에 서양화의 씨를 이식했다.
뿐더러 그는 1925년 또다시 「파리」로 떠나서 1927년 「살롱·르·돈」일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국제 전 입선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다.
이 무렵 그가 「파리」에서 그린 작품들이 몇 점 남아 있어서 그것은 비록 습작이지만 한국 근대회화 사에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고국에 돌아온 선생은 중앙학교나 보성학교 등 주로 학교에서 미술 교육에 종사하고 많은 미술가를 양성했다.
오늘날 화가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한국회화의 중견이 되었다는 사실은 미술교육자로서의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바다.
화가로서의 선생은 이 무렵 즉 l930년대와 40년대가 가장 볼만한 작품을 남긴 시기였다.
그것은 「파리」수학시절의 습작을 바탕으로 해서 평면적인 효과가 질은 독특한 화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치열해진 전쟁의 양상은 다정다감한 예술가의 전도에 좌절을 가져오고 그는 마침내 술의 나라로 들어가서 자기도 잊어버리고 버리려 했다.
물론 그의 풍류는 이미 동경 유학시절이나 「파리」유학시절에 꽃을 피운 선천적인 것이었다.
그 선천적인 것이란 일생 돈을 벌지 않아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뜻 도 된다..
따라서 선생은 비록 생은 근대에 태어나서도 이조사회에서 볼 수 있는 멋있는 선비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인생을 즐기며 예술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생활태도는 타고난 덕성과 더불어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훨훨 하늘 저쪽으로 날아간 것 같은 이종우 선생의 생애는 가장 인간답게 살고 그리고 예술의 흔적을 우리에게 남겨놓고 간 멋진 근대의 선각자였던 것이다. 많은 추억과 친구와 그리고 작품을 남겨놓고 선생은 떠나갔다.
삼가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이경성 <홍익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