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말의 덫에 갖힌 한국인의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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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27면

샌프란시스코와 시에라네바다 산맥 사이에 ‘새크라멘토’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호수와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인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 농경지다. 지난 10일 그 곳을 방문했다. 미주지역 한인공동체 순회특강 여정에 끼인 기회였다.

그날 나는, 그간 주장해왔던 나의 직관적 가설이 검증되는 순간을 맛보았다. 그 가설은 “우리 삶은 언어의 덫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 나라의 언어가 긍정적 기조를 이루고 있으면 삶 역시 긍정적인 색채를 띠지만, 그 반대이면 부정적인 색깔을 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나는 행복하다”라는 문장이 일상화된 언어권에서는 대다수가 쉽사리 행복을 구가하지만, 그 문장을 쓰는데 인색한 언어권에서는 자신의 삶에 “행복하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왠지 익숙지 않다.

정말로 그러한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날 나는 청중들에게 물었다. “행복하십니까?” 얼른 대답이 안 나왔다. 우리말로 “나는 행복하다”라는 문장을 별로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권 한인들을 만날 때 내가 느낀 것은 그들에게 “I’m happy”라는 말과 표현이 매우 빈번하고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Are you happy?” 하고 물어도 “Yes, I’m happy!”라고 대답하는 그들.

나는 그 자리에서 이러한 언어문화가 가져오는 삶의 다른 태도에 대해 청중들에게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그야말로 박장대소하며 무릎을 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들도 “I’m happy”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어지만 막상 한국말로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곧바로 “네, 행복합니다”라는 대답이 나오기란 어색하더라는 것. 그날 함께 공감하여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한국말로 돌아오면 진지해지고, 영어로 돌아가면 happy해진다.”

차제에 졸저 『천금말씨』의 단상을 빌려, 나머지 얘기를 더 해보자. 매번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대한민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가운데 행복지수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통계 발표를 접하곤 한다. 이는 현실의 사실적 반영일 수도 있겠지만, 선언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곧 “불행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얘기다. 처음 설문조사를 할 때 응답자는 조사 문항 몇 마디에 걸려 자신의 본래 현실보다 훨씬 부정적인 답변을 했을 수도 있다. 설문조사를 하는 순간 갑자기 억울하단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소득· 학력· 근로시간· 여가 등등과 관련된 문항들에 자극을 받아 자꾸 남들과 비교하다 보니까, 은근히 화가 나는 걸 어쩌겠는가?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에이, 나는 행복하지 않아!”가 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주어진 자연환경으로 보나, 경제 수준으로 보나삶의 질이 과히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언어 관습이 워낙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일 터다. 그러므로 “행복하세요?”라는 물음에, 0.1초 만에 “행복하다”라고 답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현실은 객관적으로 행복한 면도 있고 불행한 면도 있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부가 ‘불행’으로 도색된다. 반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의 생애가 온통 ‘행복’의 색깔을 띠게 된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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