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집 동시에 낸 박범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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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돼 등단, 올해로 작가 경력 만 30년이 된 소설가 박범신(57.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씨가 장편소설과 시집을 나란히 펴냈다.

2년간 계간 문예지 '작가세계'에 연재했던 소설 '더러운 책상'(문학동네)은 2000년 펴낸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이후 3년 만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는 그의 첫 시집이다.

벚꽃잎이 분분히 날리는 17일 오전 명지대 본관 뒷동산에서 만난 박씨는 기자가 대뜸 계절과 창작의 상관 관계를 묻자 "볼거리가 많아 산만해지면 마음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며 "때문에 봄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꽃들은 한창 피어나고 있는데 마음 속에서는 웬일인지 벌써 지기 시작한 느낌이 들어 강의를 앞두고도 꽃을 바라보며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다 강의 도중 제자들에게 술먹은 사실을 들키곤 한다"는 것이다.

절정에 다다르기도 전에 쇠락을 감지하는 감수성은 박씨로 하여금 첫 시집을 내는 '일탈'을 감행하도록 했을 것이다. 박씨는 "소설이 정연한 논리를 따라야 하는 일종의 과학이라면 시는 이를테면 논리의 억압에서 풀려나 본성과 마주하는 아름다운 휴식시간"이라고 자신의 시론을 펼쳤다.

때문에 박씨는 "소설을 쓸 때는 불행하지만 시를 쓸 때는 행복하다." 박씨가 90년대 들어 틈틈이 써온 시들은 '고압선의 시행'(김승희), '시의 비밀을 아는 소설가'(정호승)같은 시인들의 상찬에 값할 만한 것들이다.

가령 박씨는 천지사방 꽃으로 뒤덮인 봄 풍경을 '봄날 온 산천에/종환(腫患)들이 떼지어 솟아/터진다/피고름이 터진다//무섭다'(꽃 전문)라고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역시 방점은 소설에 찍어야 할 것이다. 열여섯살에서 스무살까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성장소설이자 예술가 소설인 '더러운…'은 고등학교 1학년생인 주인공 유신이 어느날 새벽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됐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잠을 깨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신은 다름아닌 박씨의 분신이다. 재클린의 품에 안긴 채 머리에서 피를 쏟는 케네디, 며칠 후 고아원 옆에서 발견하는 버려진 갓난아기 등 유신이 체험하는 끔찍한 삽화들은 섬광 같은 작가적 직관을 통해 세계가 폭력적인 광기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으로 열여섯살 유신을 이끈다.

그런 비극적 세계관은 유신을 철저한 위악으로 몰아간다. 유신의 10대 후반은 두차례의 자살 기도, 비뚤어진 바로잡기 위해 담임선생이 특별 배려해 붙여준 '범생이' 친구 4명을 음주와 오입으로 이끄는 위악, 60년대 호남 제일의 유곽촌이었던 이리시 철인동 창녀들과의 교분, 즉흥적인 방랑과 도피, 병적인 독서 탐닉, 성병 감염 등 살풍경한 것들로 채워진다.

비극적 세계관을 가진 모든 사람이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씨는 "폭력적 현실 세계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는 철저한 타락을 통해 영혼의 순수함을 지키는 '역설적인 저항'"이라고 설명한다.

소설 속에서 철인동 창녀들이 유신의 시 낭송에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문학에 공감하는 순수함은 오히려 밑바닥 인생들에게 더 친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음의 한 시기를 뚝 떼어내 드러매틱한 이야기 전개와는 거리가 있는, 밋밋한 에피소드 나열로 그칠 뻔한 소설을 다채롭게 하는 것은 독특한 형식 실험이다. 40년 전 고등학생 유신과 2002년 현재 기성 작가가 된 유신의 내면세계.독백 등이 교차 등장, 소설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70~8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박씨는 90년대 초반 절필을 선언했었다. 96년 소설판으로 다시 돌아온 후 박씨의 소설은 인기에 연연하는 듯하던 이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변화의 흐름은 2003년 독특한 형식 실험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씨는 "소설과 함께 한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면 '성질 더러운 년'하고 살림한 기분이다. 살림을 다 때려부순 적도 있었고 때때로 오르가슴에 오른 적도 있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절망한 적도 있지만 같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 무엇이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과 지지고 볶은 지난한 과정이 박씨 소설을 새롭게 하고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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