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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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씨 뿌리는 때가 따로 있습니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늦어도 안 되지요. 그렇다고 씨 뿌리는 날이 몇 월 몇 일이라고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농사일에 서투른 저는 마을 어른들이 씨 뿌리면 덩달아 뿌립니다. 그분들끼리도 씨 뿌리는 때가 조금씩 다르지만, 김매지 않은 밭에 씨 뿌리는 법은 없습니다.

어머니 병간호 하느라 객지 밥 먹게 된 친구가 다녀간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 친구가 부탁한 작은 밭도 아직 다 못 맸는데 이백 평 남짓한 밭도 매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쉬지 않고 매달려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일이었습니다. 마음으로야 벌써 밭을 매고도 남았지만 집에도 할 일이 쌓여 마음만 부산해졌습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풀은 더 무성해지고 볕은 더 뜨거워질 겁니다. 이 때를 놓치면 친구네 겨울 양식도 마련할 수 없게 됩니다. 집안일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한나절 김을 맸는데도 일한 표가 나지 않았습니다. 담배를 물고 밭에 퍼질러 앉으니 멀리 비어 있는 친구 집이 보였습니다. 빈 집이 껄껄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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