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정신 줄 놓는 즐거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직장인 대상 강의를 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일 일정표에서 갑자기 반나절이 비어있으면 어떤가요?”

가장 많은 대답은 “불안해요. 뭔가 중요한 것을 빼 먹었을 것 같아요”이다.

그 다음이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다.

“와, 신난다! 반차를 내고 영화 보러 갈래요”라고 말하는 용감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반차가 잘못된 일일까? 어느 새 사람들의 마음속은 이미 꽉 차 있어서 그렇다. 하루 종일 회의하고 준비하며 또 움직인다.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간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는커녕, 주어진 일을 제 시간에 해내는 것만도 버거울 뿐이다. 효율적으로 스케줄을 관리해도 시간은 언제나 모자라고 마감에 겨우 맞춘다.

결국 집으로 일할 것을 싸들고 가기 시작하고, 주말에도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피곤하고 짜증이 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더 이상 태울 것도 없는 재만 남게 될까봐 무섭다. 세칭 ‘번 아웃(burn-out) 증후군’의 증상들이다.

태엽을 한 방향으로 계속 감으면 점점 태엽의 성능은 떨어지고, 결국 망가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열심히, 최대한 빨리, 최선을 다해서’의 방향으로 태엽을 감듯이 살아왔다. 마음에 일종의 관성(慣性)이 생긴 상태다. 그래서 고치기 쉽지 않다. 짜증이 잦아지고 쉬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이상(異常) 신호가 와도 관성대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라고 자신을 다그치기 일쑤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이젠 한 쪽 방향으로만 가는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러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을 만들고 멍 때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성공적인 인맥관리 회사인 ‘링크드인’의 CEO 제프 위너도 ‘스케줄 잡지 않음의 중요성’이란 글을 썼다. 그는 하루 종일 회의하고 중요한 것들을 결정해야 하는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일정표에 최소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회색 칠을 한 공간을 만든다. ‘버퍼(buffer)’라고 부르는데, 사무실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시간을 확보한다. 숨을 돌리기 위해서다. 회사에 있는 시간 내내 회의를 한다면 하루가 내 것이 아니고, 자기 삶을 조종할 수 없다는 느낌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시간에 큰 스케일의 일을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이런 시간을 확보한다. 그는 이런 시간은 단순한 휴식시간이 아니라 최고의 투자이며, 가장 중요한 생산성 향상 도구라고 주장한다.

그도 처음엔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칫 경쟁에서 뒤로 밀릴까 불안하기도 하고, 밀려들어오는 업무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시간을 확보하고 실천한 결과, 오히려 생산성이 훨씬 올라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조바심내고, 무엇을 더 할까를 고민하며 긴장과 불안 속에 자신을 다그치진 말아야 한다. 의도적으로 아무 것도 안하는 시간을 만들려 노력하고, 빈 공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조직·사회의 요구에 휩쓸려 인생이 소모되며 방전돼 버린다는 느낌이 아닌, 내가 나의 삶을 조종하고 만들어가고 있다는 자기 확신감을 확보할 수 있다. 오늘부터라도 멍 때리며 산책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자. 그게 번 아웃되지 않고, 하나뿐인 내 심신을 잘 보전하는 길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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