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의 데뷔시절 조민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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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 신춘문예와 직접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다. 딴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양으로. 또 딴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작품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소설 한편을 써서, 따라서 당선할 것을 확신하고,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처음 응모를 한 것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확신이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이듬해 1월1일자의 신문에서 나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았어도 나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심사위원을 비웃고 신문사의 예심과정을 의심했다. 무언가 잘못이 행해졌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실로 터무니없는 자신이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짓인가에 대한 자성도 따라서 없었다.
나는 그 뒤로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그런 터무니없는 확신 밑에 나의 신춘문예투고 행위를 계속했다. 그리고 번번이 배신을 맛보았다. 점차 나의 확신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생각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나의 대학시절을 거의 끝내가고 있었고 나보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내 친구들은 하나 둘씩 이미 자신이 정한 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할 즈음에는 내 친구들은 거의 모두 신인작가나 시인이 되어있었다. 나는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터무니없는 우월감이 열등감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군에 복무하는 3년 동안 나는 나의 터무니없는 우월감과 함께 열등감을 치료할 수 있었다. 군대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을 평준화시켜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정당한 명가를 비로소 할 수가 있었다.
나의 터무니없던 우월감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우월감의 반동이었던 열등감도 사라졌다. 그대신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정당한 시야를 조금씩 얻기 시작했다.
군에 복무하는 3년 동안 나는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았다. 그 기간이 나에겐 신춘문예와 나사이의 유일한 공백기간이었다. 이를테면 나의 사춘기적 문학병의 치료기간이었던 셈이다.
나는 비교적 건강해져서 군으로부터 제대했다. 그러나 치료는 완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허영심은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신춘문예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두군데쯤 동시에 당선해야 체면이 좀 서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는 사춘기시절의 허영심이 아직도 그 잔재가 깨끗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편의 소설을 썼다. 그리고 이번엔 실패해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두편을 각기 서 너 번씩 고쳐 썼다.
내가 무슨 일에건 그만큼 열중해본 적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매일 죽는 사람』과『멘드롱·따또』였다. 그것들은 실로 썼다기보다는 만든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얘기도 되겠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반밖에 성공할 수 없었다.
두군데의 신춘문예에 각각 응모했던 두편의 작품 가운데 『매일 죽는 사람』만이 겨우 겨우 낙선을 모면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째서 꼭 그렇게 신춘문예를 통과해야만 하는 것으로 악착같이 믿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상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역시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신문이라는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자기 작품을 읽힐 수 있는 지면을 통해 「데뷔」한다는 허영심….
나는 요즘도 나의 은밀한 곳에 숨어서 때때로 음험하게 고개를 쳐들곤하는 허영심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병이 아직도 완치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작가·70년도 신춘 「중앙문예」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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