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신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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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 사가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왔다.』
언젠가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 한마디는 바로 그 인품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혁명의 횃불을 든 것도, 그 후의 많은 정치적 굴곡과 결단들도 모두 그런 강지의 일면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때때로 고독한 지도자로, 혹은 독선적인 정치가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같다.
그것은 「웅변가로서의 지도자」보다는 「신념으로서의 지도자」로, 『「슬로건」의 정치가』보다는 「행동의 정치가」로서 군림했던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비록 그의 18년여 치세는 짧은기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동안의 잇따른 파란을 생각하면 그는 결코 영광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부석신명」의 일생을 마친 「개발의 역군」이며 「사명의 기수」였다. 이것을 위해 그는 몸도, 마음도, 그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자신만 아니라 그의 영부인까지도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부석신명」은 원래 불교용어의 하나다. 『백련과 같은 훌륭한 가르침』이 담긴 법화경 가운데 『종종공양 부석신명』이라는 구절이 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갖가지로 중생에 공양하여 불타의 뜻을 사파에 펴겠다는 신앙고백의 엄숙한 경지에서 비롯되었다.
법화경은 『일심으로 깨침을 얻고자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아니한다』라는 구절도 담고 있다. 이런 각오없이는 누구도 끝내 성불하지 못할 것이다.
부석신명은 자못 해탈의 경지아니면 쉽게 이룰 수 없다. 한 인간이 세상에 나서 그런 결연한 의지와 마음가짐 한번 펴보지 못한다면 큰 뜻을 성취할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오늘 비록 유명은 달리했지만 그런 점에선 한이 없을 것이다. 자신은 물론 그의 영부인까지도 부석신명의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바로 그의 영도아래서 어쨌든 빈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어떻게 노력하면 가난을 이길 수 있다는 산 체험과 신념과 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후세 사학가의 평가를 받고싶다는 그의 초연한 심정은 바로 그 봉사와 신념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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