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그늘에서 박경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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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병든 육신에 담긴 넋
육신따라 병들어 있는 넋을
떼어내려고
불볕의 바다에서 몇날 며칠
바위에 절인 찜질로도
따개비보다 더 완강하게 버티던
그들, 육신과 넋.
병든 넋에 붙어 곪아가는 이름
욕된 서푼어치 이름만이라도
떼어내 가지려고
몇 날 밤을 연이어
살점을 파고드는 서늘바람에 맡겨도
피만 울릴 뿐
뼈에 붙은 살코기보다 더 질기던
그들, 넋과 이름.
그들, 나한테서 나 아닌 것이
상달의 단풍그늘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떨어져 갈라섬이여.
갈라 서는 육신과 넋
갈라 떨어지는 넋과 이름.
생전 처음 값쳐 주게된 상달이여.
떼지어 입다문 단풍의 하나로
지레 썩어 땅으로 돌아가느라니,
시린 하늘 밖에서 홀로
깡마른 번개를 터뜨려 우는
저기 저 불씨 한 점, 내 이름.
▲40년 경북포항출생 ▲동국대수학 ▲58년 동아일보 및 한국일보 신춘문예부 당선「데뷔」 ▲69년 제2회 세종문학상수상 ▲시집 『어른에겐 어려운 시』『그 날 그 아침』, 동화집 『날아온 새』등 다수.

<시의주변>
상달, 단풍 그늘에 안겨 한나절을 앓고 있느라니, 현실과 이상, 혹은 순간과 영원에 대한 모순의 문이 문득 빗장을 끄르는 것이었다. 뜻밖에 얻어진 귀한 체험이고 보매, 오늘을 사는 나는 그거나마 소중히 노래로써 챙길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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