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빼돌려도 벌금만 … 구멍 난 개인회생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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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개인회생·파산·면책·빚탕감’.

 이모(39) 변호사의 서울 노원구 소재 사무실 앞에는 이 같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항상 붙어 있었다. 그는 2012년 3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400여 건의 개인회생 사건을 처리하고 5억여원을 수임료로 받았다. 그가 불황을 뚫고 독보적인 성과를 낸 비결은 간단했다. 불법 수집된 개인회생 신청자 정보를 2억3000만여원에 산 뒤 이들에게 연락해 회생 신청을 내도록 했다. 한동안 재미를 봤지만 검찰에 덜미가 잡혀 지난해 말 기소됐다. 검찰은 “우리 경제의 근간을 무너뜨렸다”며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은 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재기의 기회를 주는 개인회생제도가 흔들리고 있다. 불법적으로 수집된 개인정보를 활용해 개인회생을 부추기거나 재산을 몰래 빼돌린 다음 빚만 탕감받는 ‘모럴해저드’ 현상 때문이다. 이런 불법행위로 인한 부작용이 커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불법 행위로 입게 되는 선량한 채권자의 피해는 결국 돈을 빌려야 하는 국민에게로 돌아간다“며 “법원이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인회생제도 악용 사례에 대한 관용적 처벌도 이어지고 있다. 사기회생죄의 법정형은 징역 5년 이하 또는 벌금 5000만원 이하다. 그러나 대부분 집행유예나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은 지난달 말 개인회생 신청 후 전세금과 회사 월급을 딸의 계좌로 받아 온 혐의로 기소된 이모씨에 대해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개인회생을 신청해 놓고 전세금 1500만원과 매달 238만여원을 딸의 계좌로 빼돌렸다. 2억여원의 빚에 시달리던 직장인 박모씨는 개인회생을 신청하면서 아내가 진 3000만원을 자신의 빚이라고 신고했다. 법원은 박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빚을 탕감받기 쉽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개인회생 신청건수는 나날이 급증하고 있다. 2010년 4만6972건이었던 신청자 수는 지난해 10만5885건으로 증가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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