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美 성직자, 새 한글자판 개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한 글자를 한 번의 손놀림으로 입력할 수 있는 새로운 한글 자판이 개발됐다. 그런데 개발자가 컴퓨터 공학도가 아닌 신부다.

주인공은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안영윤(安永閏.67.성공회.(左))신부. 그가 9일 세상에 내놓은 자판은 기존 자판과 모양은 같지만 같은 자음이라도 머릿자와 받침을 구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기존 자판으로 '각'을 쓰려면 'ㄱ'과 'ㅏ' 그리고 'ㄱ'을 순서대로 입력해야 했지만 이 자판으로는 세개의 글자쇠를 동시에 눌러도 컴퓨터가 알아서 글자를 조합한다. 숙련되면 입력 속도를 10% 이상 높일 수 있다고 한다.

1975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성직자 생활을 해온 安신부가 자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정착 초기. 자신보다 늦게 미국 생활을 시작한 교포들에게 생활안내서를 만들어주려고 타자기를 두드리다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자서 자판 연구를 거듭한 그는 10년 만인 85년 현재와 같은 자판을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갑자기 늘어난 성당 업무 때문에 연구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安신부가 이렇게 방 구석에 놓여 있던 자판을 다시 꺼내든 것은 96년. 인터넷을 뒤지다 우연히 중국 옌볜(延邊)에서 한글입력처리학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옌볜대의 한인 교수들과 함께 새 자판의 성능을 검증하고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귀인(貴人)을 만났다. 바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김진형(金鎭衡.54.전산학과.(右)) 교수다. 安신부의 자판을 본 金교수는 "아이디어가 좋다"며 관심을 보였고 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아 윈도 프로그램에 사용할 수 있는 자판으로 제작했다.

安신부는 "金교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내 자판이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