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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없었다면 폐간했을 산케이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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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현기
도쿄 총국장

일본에 오기 전 도쿄특파원을 지낸 선배에게 들었던 충고를 아직 기억한다. “산케이는 절대 인용하지 말아. 다 ‘뻥’이니까.”

 당시는 그냥 웃으며 넘겼다. 실제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보니 산케이 기사 중 소개할 만한 기사도 가끔 있었다. “사안을 이렇게 180도 거꾸로 볼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일본 사회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좋게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최근 산케이 보도를 보고 있노라면 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23일자 1면 머리기사는 지난 11일 서울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 관련 기사였다. 집회 현장에 8일 숨을 거둔 배춘희 할머니의 영정이 있었던 것을 두고 산케이는 큼지막한 제목을 뽑으며 이렇게 적었다. “위안부는 죽어서도 여전히 대일 역사전의 전사로 떠받들어져 반일(反日)의 도구로….” 생전에 일본이 저지른 인권 유린에 대해 제대로 사죄도 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할머니의 죽음을 황당하게도 ‘반일의 도구’ 운운하며 폄훼했다. 논조의 차원을 떠나 저질의 극치다.

 한국 측 인사의 발언을 앞뒤 다 잘라내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끔 논점을 바꿔치기 하는 것도 다반사다. 17일자에선 고노 담화 발표 당시 주일대사관에 근무했던 전 당국자가 “일본이 먼저 ‘상담’에 응해 달라는 요청을 해와 통상적인 의견 표명을 했다”고 말한 것을 두고 “양국 정부가 문안을 조정했다. 고노 담화의 ‘거짓말’이 또 하나 드러났다”고 둔갑시켰다.

 23일에는 “한국과 알제리의 월드컵 축구시합 도중 알제리 선수 얼굴에 레이저 포인트가 맞춰져 있었다”며 교묘하게 한국 팬의 소행인 것처럼 보도했다. 산케이 인터넷 판에는 이 기사가 톱 기사였다. 일본의 한 유력지 기자는 “한국이란 ‘소재’가 없었으면 아마 산케이는 신문을 만들지 못하고 폐간했을 것”이라는 농담으로 산케이의 ‘반한(反韓) 보도’를 빗댔다.

 4월 시작한 산케이의 기획 ‘역사전(戰)’이란 제목도 이웃나라를 전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발상이 느껴진다. 일본을 태평양전쟁으로 내몬 주범의 하나도 국가주의적이고 대외 팽창주의적 선동에 나섰던 언론이었다.

 산케이가 극우의 선봉에서 아베 정권의 2중대를 자처하고 나서건 말건 그건 산케이의 자유다. 하지만 아무리 산케이가 물구나무서기 한 채 역사를 뒤집어 해석하려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일본은 가해자이고 한국은 피해자였다는 불변의 사실(史實)이다. 이제라도 그걸 알고 기사를 쓴다면 “산케이 기사도 인용할 건 해라”는 말을 후배에게 들려줄까 한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이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