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아낀 선조들] 홍역 물리친 이헌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8면

요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으로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있다. 의학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알 수 없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대단한데, 하물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다양하고도 위협적인 전염병에 노출됐던 조선 사람들은 많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홍역이 자주 창궐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이때 새로운 치료법을 이용해 환자들을 고친 의사가 있었으니, 생긴 것이 너무 못나 서울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 보았다는 몽수 이헌길이었다.

그의 생김새는 '너무 말라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데다 코주부였으나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왕실의 후손이었으나 의학을 배워 인술을 펼친 의사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몽수는 어릴 적부터 총명해 기억력이 비상했다. 자라면서는 서학(西學)에 일찍 눈을 뜬 실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던 그가 1775년 봄, 일이 있어 서울에 갔을 때다. 마침 홍역이 번성해 수많은 백성이 희생되고 있었다. 이헌길은 이를 치료하고 싶었으나 당시 상주(喪主)의 몸이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는데 서울 교외를 나서자 시체를 삼태기에 지고 가는 자들이 잠깐 동안 수백명이나 됐다. 몽수는 의술을 익힌 자로 이들을 치료해야지, 유교의 예법(禮法)에 얽매인다면 안될 것이라고 마음 속에 되뇌면서 서울의 한 친척 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스스로 배우고 익힌 새로운 처방들을 알리기 시작했다.

몽수의 치료법을 얻으면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살아났으며 열이 오르다가도 내렸다. 열흘이 못 가 몽수의 이름이 서울 장안에 크게 떨치자 많은 사람이 치료를 해달라고 그의 집 앞에 늘어섰다. 지위가 높은 자들도 그의 방에 들어가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이헌길은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신속하게 처방들을 내렸다. 가난하다고 쫓아내거나 천대하지 않았으며 권세 있고 부자라고 해서 더 좋은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가 가득했지만 이미 홍역 치료법에 대해 훤하게 꿰뚫고 있던 몽수는 환자를 보기만 하고도, 또 상태에 대해 두어 마디만 듣고도 병의 증상을 쉽게 이해하고 즉각 처방을 내렸다. 효력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몽수가 때때로 거리에 나와 다른 집으로 갈 때는 수 많은 사람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때문에 그가 이르는 곳마다 먼지가 자욱이 일어나 누구든지 그것을 보고는 이헌길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헌길은 자신의 처방들을 정리해 새로운 홍역 치료서를 저술했다. 이는 당시까지 조선의 구태의연한 의사들이 전연 받아들이지 않던 새로운 내용들이었다.

이헌길을 이어받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선생의 업적을 더욱 확장해 홍역 치료 백과사전인 '마과회통'을 저술했다.

서문에서 다산은 '어려서 홍역으로 죽을 뻔한 나를 이헌길 선생이 살려주었으니 이제 그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는 헌정(獻呈)의 축사를 잊지 않았다.

김호 서울대 규장각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