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아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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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캥(1858~1917)이 '아노미(Anomie)'라는 사어(死語)를 되살려낸 것은 스스로 인류사에서 가장 불안정한 혼돈의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과 전쟁이라는 극단의 시대를 살았다. 청년 시절 그는 프랑스혁명의 막바지 파리코뮌과 같은 극단적인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목격했다.

유대인 학자로서 같은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가는 반(反)시오니즘(Zionism.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의 광기에 몸서리쳤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루한 참호전에서 아들이 주검으로 실려나온 다음해 세상을 등졌다.

뒤르캥이 사회과학 용어로 사용한 '아노미'는 '규범.도덕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질서를 유지해온 규율과 도덕이 변혁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고 남은 무질서와 혼돈을 말한다.

뒤르캥이 1893년 처음 아노미란 개념을 사용했을 때는 그저 '일탈적 행동을 초래하는 무규범 상태'를 뜻했다.

일탈적 행동 가운데서 뒤르캥이 주목한 사회현상은 '자살'이다. 1897년 '자살론'이 발표되면서 아노미란 말도 유명해졌다. 사회학자가 자살에 주목한 이유는 도덕과 규범이 사라진 상황에서 나타나는 여러 일탈 가운데 자살이 가장 극단적이며 전형적이기 때문이었다.

아노미한 사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가치에 회의하며 새로운 목적의식에 불안해하기에 매사에 공허해하기 쉽다. 삶의 무의미함은 나아가 소외감과 강박관념을 넘어 마침내 자살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뒤르캥에 따르면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지만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이며, 살인의 한 유형이다.

뒤르캥은 아노미에 따른 자살과 반대되는 형태의 자살을 '이타적 자살'로 정의했다.

사회적 규범과 도덕이 너무나 엄격해 자살하는 경우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자살 폭탄테러는 민족주의와 종교라는 거대한 두 도덕률이 빚어낸 이타적 자살의 전형이다.

뒤르캥이 이타적 자살보다 아노미에 따른 자살에 더 주목한 것은 아노미가 보다 보편적인 사회현상인 탓이다.

한 교장선생님의 자살은 최근 우리 사회의 아노미적 상황을 상징하는 듯하다. 국민교육헌장과 베트남전에 익숙한 그에게 전교조나 반미.반전시위는 아노미로 비춰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방식이 무시당하는 혼돈에 괴로웠을 것이다. 그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