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쌀 팔러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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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시골에 살다보니 먹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그 중에서도 쌀.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쌀 팔 돈마저 간당간당할 무렵, 멀리서 친구 병훈이가 쌀 한 가마니를 가져 왔습니다. 눈물나게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아내는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한 쌀을 보며 자꾸 웃었습니다. 쌀이 넉넉하니 반찬 부실해도 근심이 없었지요. 그날 이후부터 형편이 좀 나아진 지금도 쌀 팔러 가는 날이면 내외가 신바람 납니다.

쌀 팔러 농협 가는 날, 앞장선 아내의 걸음걸이는 참 당당합니다. 뒤따르는 남편도 히죽히죽…. 20Kg 한 가마니면 식구들이 한 달 내 배부릅니다. 공과금도 내고 반찬도 사고 학용품도 사 줘야 하지만 그건 나중 일입니다. 쌀가마니를 둘러멘 남편은 오히려 힘이 납니다. 잠깐이라도 아내에게 쌀가마니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게 가장한테 얼마나 신나고 중요한 일이라고요. 가장은 쌀독에 쌀을 붓고 나서 쌀을 휘저어봅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쌀알의 감촉은 벌써 김나는 밥이 되고 아이들 몸이 되고 사랑이 됩니다. 다시 쌀 팔러가는 날까지 우리 식구는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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