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권의 표장화|서화사적 측면…최순우<국립중앙박물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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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라 경덕왕 13년 하면 바로 불국사의 큰 가람과 석굴암 미술이 이루어지는 무렵이다. 말하자면 이 무렵은 한국 미술사, 특히 불교 미술의 황금기로서 회화·조각·공예·건축 등 여러 분야의 조형 미술이 국제적인 시야를 바탕으로 때를 활짝 벗고 바야흐로 뛰어는 통일신라 미술양식이 틀 잡혀지는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무렵의 신라 건축이나 조각의 원숙한 모습에 비하면 그림에 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이 시대에 앞서는 신라 그림의 예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고령과 순흥 고분 속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벽화, 그리고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 같은 그림들이 있었지만 모두 고분 문화적 성격의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솔거 정화 홍계 등 불화 작가들의 이름이 남아 있지만 역시 그림들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최근 문화재 위원회에서 국보 지정이 의결된 신라 화엄경권의 표장화의 출현은 그러한 뜻에서 우리에겐 대망의 신라 그림으로서 반가움과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비록 이 경권의 표장화가 단편 두 쪽에 불과하나 이두 단편에는 앞뒤에 다른 주제를 다룬 금니 그림에 은니를 부분적으로 곁들인 작품이 있는데, 이것은 표장과 권수 그림의 구실을 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이 표장화가 언뜻 마지처럼 보였지만 저근에 산 향수해서 제지했다고 발문에서 밝힌 것으로 보아 닥종이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른바 고대 자색 즉 가지색으로 염색된 치밀한 종이여서 언뜻 고려 시대의 쪽빛 마지를 연상케 하지만 그 쪽빛과는 다른 색상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사경권축은 2권으로 돼 있으나 이 표장 그림은 2편이 연결되었던 한장 그림뿐이므로 것 권에만 붙었던 표장화 인지 또는 다른 권의 표장은 일실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돼 있다.
어쨌든 한 면에는 화염 광 배를 등지고 연화족 좌 위에 발을 앉고 운두 좌 위에 걸터앉은 역사상의 모습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매주 꽃 모양의 보상 화 그림으로 채운 것으로 보아 표지 그림의 구실을 했음직하다.
다른 한 면에는 사자 좌 위에 앉은 보살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이 시좌 해 있는 보광명회 설법 도다.
따라서 그 배경은 계화풍의 2충 보루로 되어 있는데 2층 지붕마루에는 황룡사 터 출토의 전형적인 신라 치 미가 분명하게 표현돼 있고 양추녀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다. 인자 차가 보이지 않는 왕심포 집인 듯이 표현됐고 2층 지붕 아래는 수당 불화의 보루에서 볼 수 있는 보수엽이 촘촘히 그려져 있다.
보루 우측 천공에는 4위의 화불(보살)이 운두 연화 좌 위에 앉아 있는데, 파손된 좌측 천공 부분에도 마땅히 화불들이 떠 있어야만 좌우 대칭으로 배치된 운두 좌로 보아 분명하다.
이 설법 변상도가 이 경권의 권수 그림 구실을 했음은 표장 그림으로 판단되는 역사도의 안쪽에 그려졌음으로써 짐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불 보살의 좌세·수상·광배 등은 중국 당시대 보살상의 묘법과 양식에 공통점이 많을 뿐더러 석굴암 시대다운 원숙한 솜씨다. 중국에서 이러한 예를 들자면 특히 순황 14 8굴 배감의 제보살상 솜씨와 인상이 매우 근사하다.
이러한 별 견으로 신라 불화의 참모습을 다루는 것은 성급한 일이 되겠지만 이 그림이 당 천보 13년의 연기를 밝혀 주는 작품으로서 그 무렵 신라의 불화가 성당의 불화 기법과 얼마만한 관계가 있었는가는 너무나 잘 보여준다고 해야겠다.
더구나 이 사경의 발문에 불 보살상 필사로서 대경의 의본한나마·정득나마·부득사지·두오사 등 그림의 작자들이 밝혀져 있는 점은 이 뛰어난 신라 그림의 미술사적 값어치에 천금의 무게를 더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권축의 표장 그림에 붙어 있었을 경제필사로서 대경의 동지 대사 육두품 부길득아손의 이름 또한 밝혀져 있어서 모든 것이 정제돼 있던 통일신라 성대문화의 양상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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