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와 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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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바둑의 예법은 매우 까다롭다. 가령 중요한「타이틀」전이 있을 때에는 무조건「타이틀」 보지자가 상좌에 앉도록 되어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단차가 있으면 젊은 고 단자가 상좌에 앉는다.
물론 단이 같을 때에는 선배가 상좌에 앉도록 되어있다.
흑백을 가릴 때에도 상좌의 기사가 돌을 쥐도록 되어 있다. 지난 주말 동경에서 우리의 조훈현 왕위가 일본의 등택수행 기성과 대국했을 때에는 처음부터 조 왕위가 집흑, 3호 공제로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대 선배에 대한 예우를 따른 것이었다. 보통 호선의 경우는 5호반 공제가 된다.
예전에는 4호 반공제였다. 그러니까 백을 쥔 쪽의「핸디캡」이 너무 컸다. 그래서 5호 공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5호 공제로 하면 빅이 되는 수가 있다. 그런 때에는 백쪽이 이기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니까 5호우 공제나 5호 공제나 같은 예기다.
고 단자의 대국에서는 이렇게 한집, 반집이 문제된다. 따라서 등택 기성에게는 2호반의 차는 큰 부담이 될 만도 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조 왕위쪽에 더 큰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 왕위에게 보다 적극적인 행마를 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대국의 심리는 미묘하기가 이를데 없다. 방한한 적이 있는 일본의 판전 9단은 호방한 성품으로 이름나 있다.
그러나 그도 어느 거북한 관전자가 대국 중에 방에 들어오는 소리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켜 유리했던 한 판을 잡친 적이 있다.
조 왕위는 심리적으로 위축할만했다. 상대자는 문자 그대로 일본의 기성인 것이다.
위축되면 백에 끌려다니기 일쑤다. 아니면 공연한 호기를 부려 경솔해지기 쉽다.
조 왕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이의 기백탓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부시게 원숙해진 기량 탓도 있었을 것이다.
판전 9단의 말로는 그때 그때의 기분으로 돌 놓는 소리는 달라진다. 돌 소리에서 살기가 느껴 질 때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돌 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기력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우세한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관전자의 전하는 말로는 조 왕위가 놓는 한 수 한 수의 돌 소리는 어딘가 낭랑하고 기백에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물론 승부의 세계에서는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한번쯤 이겼다고 우리네 왕위가 기성보다 높다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근저 조 왕위가 몇 해 사이에 놀라울 만큼 자란 것을 기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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