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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과 '까치밥' 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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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시인 백무산은 역설적으로 세월호를 애도했다. ‘분노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슬픔은 장마처럼 지나가고, 아! 세상은 또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시 시인인 야당의 도종환 의원이 백무산의 시를 받아 6·4지방선거 직전 걱정스러운 논평을 냈다. “선거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승리의 환호로 세월호를 잊고, 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패배로 죄를 씻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면서.

 하지만 선거는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았다. 어느 쪽도 세월호를 잊지 말라는 명령일지 모른다.

 선거가 끝났다. 시인의 예언대로 분노는 흩어지고, 슬픔은 지나가고 있으며, 또 그렇게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일까.

 안개는 걷히고, 장마는 잦아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지 않은 건…아니다.

 선거에 나타난 세상의 작은 변화로 지역주의의 완화를 본다. 지역주의. 불변은 아니다.

 대구의 김부겸. 그는 패배자다. 이기면 선, 지면 죄인인 선거판에서 하지만 조금은 다른 ‘의미 있는 패배자’다. 김부겸은 40.3%를 얻었다. 기호 2번, 새정치민주연합 간판을 달고서다. 이 정도면 사건이다. 만약 이겼다면 그건 변화가 아니라 혁명이라 불러야 한다.

 부산의 무소속 오거돈 후보는 49.3%를 얻었는데 그게 무슨 사건? 49.3%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기호2번을 달고 정면 승부해서 얻은 40.3%와 등가(等價)로 놓을 순 없다.

 거의 습관처럼 기호1번에 투표해온 대구시민이, 여느 때와 달리 ‘권영진’이라는 젊고 개혁적인 후보를 앞에 둔 대구시민이, 기호 1번의 자장(磁場) 안에서도 자력에 끌리지 않고 기호2번에 붓두껍을 꾹 눌렀다. 열 명 중 네 명이 말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김부겸이 얻은 이 40.3%만큼 변화 가능성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박원순·남경필·유정복의 당선보다 작은 의미인가.

 선거 후 후배 기자와 소주 한잔 나누면서 김부겸이 얻은 표를 ‘까치밥’에 비유했다가 토론이 벌어졌다. ‘까치밥’.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를 감탄하게 한 ‘바로 이것’이다.

 1960년 한국을 방문한 여사가 기차를 타고 가다 감나무 끝에 달려 있는 몇 개의 홍시를 봤다. ‘따기 힘들어서 그냥 둔 거냐’고 물은 여사에게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둔 까치밥”이라고 설명해준 이가 언론인 이규태씨였다. 여사는 탄성을 질렀다.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며.

 까치밥은 공존의 메시지다. 까치밥이 있는 한 날짐승이 떠나지 않는 것처럼 김부겸도 대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떠나지 마라”가 김부겸에게 준 대구시민의 메시지 아닐까.

 후배는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말했다. ‘씨가 될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구는 김부겸이 2012년 총선 때 수성갑에서 얻은 것(40.4%)만큼 시 전체가 표를 줘요. 이건 쪽팔리지 말라는 것 같고…. 수성구는 그보다 표를 더 주죠. ‘우리는 너를 종자(種子)로 보고 있다, 다음번 농사 때 쓰겠다’, 그런 것 아닐까요?”

 김부겸은 대구 수성구에서 47.49%를 얻었다. 권영진 당선자의 49.9%에는 못 미치지만 2년 전 총선 득표율보다 7%포인트 올라갔다.

 이런 민심에 김부겸은 “인생 삼세판 아니냐”고 응답하고 있다. 두 번 실패했지만 2016년 총선 때 또 대구에서 출마할 거란 뜻이다.

 이번 도전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행이다. 기왕 나선 김에 삼세판째엔 호남의 변화까지 추동했으면 한다. 3.4%. 광주에 출마한 새누리당 이정재 후보의 성적표다. 대구가 먼저 변하면 광주도 호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새누리당에서도 ‘김부겸’이 나와야 하지만 말이다.

 김부겸은 ‘하로동선’(夏爐冬扇·여름 난로, 겨울 부채)처럼 정치를 해왔다. 여름 난로. 이번엔 팔리지 않았다. 겨울이 와도 그냥 고철 덩어리일까. 패배가 모두 실패는 아니다. 장은 또 선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