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돈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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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박지원이『허생전』을 써낸 18세기말엔 우리나라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매우 보잘 것 없었던게 틀림없다.
당시 장안에서 제일 간다는 부자 변씨의 재산도 고작 몇 만냥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빈 1만냥으로 허생은 전국의 과실을 독점할 수 있었다. 돈이 그만큼 귀했으니 물건값이 쌀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허생은 제주산 말총을 모두 사들였다. 이게 또 골십배의 값으로 팔렸다.
이 같은 물자독점을 몇 번 하다보니 1만냥이 2, 3년 사이에 1백만냥으로 늘어났다.
결국 허생은 번 돈 중에서 50만냥을 바닷속에 던져버린다.
그 많은 돈이 전국에 뿌려지면 경제가 엉망이 될 것이라는 짐작에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그처럼 흔해지면 물가가 껑충 뛰게 틀림없다. 그러면 요새말로 악성「인플레」가 되어 뭇 백성들의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그러나 여기 한가지 의문이 있다. 허생이 모은 1백만냥은 모두 우리나라 은화였다.
불과 1만냥으로도 전국의 물가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통화량이 적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1백 만냥씩이나 허생원이 빼돌릴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돈 구경을 못하게 될 것은 물론이요, 전국의 유통구조가 마비되어버렸을 것이다.
2백년후의 지금에 있어서도 돈은 흔한 것보다는 차라리 귀한 편이 좋은 것만 같다.
최근에 나온 상의의『물가총감』을 보면 지난 8년 동안에「시멘트」벽돌 값이 7백59%나 올랐다.
해마다 거의 29%씩이나 오른 셈이다. 비교적 덜 올랐다는 공립고 등록금도 24%이상씩 해마다 올랐다.
물론 GNP도 그 사이에 3배나 늘었다. 통화량도 10배 가까이 늘었다. 돈이 그만큼 흔해 진 것이다.
그러니 물가가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값이 비싸도 돈이 흔한 사람에게는 조금도 부담이 가지가 않는다. 땅값이 뛰고 집 값이 마구 오르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돈이 흔하다 해도 그 돈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허생도 바로 이런게 염려스러워서 50만냥이나 바닷속에 던진 것이다.
물가는 오르게 마련이다. 원리상으로야 나라살림의 규모가 커지고 GNP가 커지면 커질수록 돈도 흔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물가고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오르는 물가를 봉급이 늘 앞지를 수만 있다면 아무 걱정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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