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기에 급급했던 항로이탈경위 서방언론의 반감만 샀다|KAL기 기장·항법사의 불성실한 기자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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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파리=장두성·주섭일 특파원】국제언론의 측면에서 볼 때 이번 KAL기 사건의 처리는 몇몇 현지 당사자의 실수로 지금까지 호의적이던 서방언론의 반감을 자초하는 방향으로 오도되었다.
이 같은 실수는 KAL기의 항로이탈경위를 밝히지 않으려는 KAL측 기도를 현지관계자들의 미숙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한 서방기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초래되었다.
문제는 첫째 기자회견에 임한 현지담당자들이 서방언론의 체질을 너무 모르는 듯했고, 둘째 주요한 회견을 통역한 KAL대표의 진행이 지나치게 무리가 있었다는데 있다.
서방측기자의 마지막 질문이 『이 사건의 진상은「타스」통신 쪽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협박조의 말이었다는 점이 이 회견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회견장 중앙에는 송환된 두 사람과 김명진 KAL「파리」지점장 및 KAL측 통역이 앉아있었는데 항로이탈경위와 소련기의 공격상황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때 서로 공공연하게 귀엣말을 주고받아 김 기장의 답변이 사전협의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드러내었다.
소련기가 KAL기 착륙 때 유도를 해주었느냐는 한 외국기자의 질문에 『모른다고 해』라고 한국말로 시키는 소리도 들렸다.
김 기장의 한국어답변 길이에 비해 통역의 말이 너무 짧아 통역이 전달부분을 취사선택해서 전하고 있다는 인상도 주었다.
그래서 회견이 끝난 다음 서방기자들은 김 기장의 답변과 통역된 내용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 한국기자에게 확인하려 하기도 했다.
실제로 통역은 김 기장의 말을 취사선택하거나 없는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한 예로 『한국에 조사기구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 질문은 답변할 수 없다』고 통역은 김 기장이 하지도 않은 말을 영어로 전했고 이 말에「힌트」를 받은 듯 김 기장이 그 다음 답변에 이 말을 그대로 한국말로 옮겼다.
또 소련전투기가 착륙신호를 하는 것을 보았느냐는 물음에 김 기장이 장황히 설명한 끝에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목욕하고 쉬는 것』이라고 답변했으나 통역은 앞 설명 부분을 모두 빼고『목욕하고 싶다』는 부분만 전해 장내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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