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책임은 늘 주인과 동행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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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아직 걸음걸이도 시원찮은 꼬마가 제 작은 의자를 끌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발판 삼아 싱크대 위로 기어오를 참이었다. 놀란 아빠가 달려갔지만 이미 아이는 바닥에 굴러떨어진 뒤였다. 아빠가 일으켜 주려니까 아이는 그래도 기가 살아서 의자를 발로 차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의자, 이 나쁜 놈. 나를 떨어뜨리고.”

 부모라면 누구나 겪어봤음 직한 이 얘기 속 아빠는 『1% 성공습관』의 저자 데일 카네기다. 인간관계 전문가인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남에게 돌리는 게 거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하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걸 이브 탓으로 돌렸고, 이브는 또 뱀의 유혹 때문이라고 떠넘긴 마당에 뭔 설명이 더 필요할까.

 아기의 의자 탓이 귀엽고 호기롭기까지 한 건 타인에 무해한 까닭이다. 하지만 커가면서 친구 탓으로 발전하고, 어른이 돼서 남 탓으로 커지는 책임회피는 선악과만큼이나 치명적이다. 후손들한테서 천국에서 살 권리를 박탈했듯, 후세들이 살아야 할 이 사회를 더욱더 무책임하고 위험한 지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종교의 탄생도 그래서가 아닌가 싶다. 그런 무책임이 쌓아 올린 위태로운 성벽 속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무책임의 벽돌을 보태며 사는 중생들을 회개시켜 구제하기 위한 게 종교 아니냔 말이다. 그래서 보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종교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종교 지도자들의 도덕성이 더욱 중시되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모그룹 전 회장 유병언씨의 태도는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이 사회에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겨놓고 언제까지 숨고 달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잘못이 있는 사장과 선장은 구속됐고 경영 일선에서 떠난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혐의도 들이대지 못하면서 자신을 옥죄는 검찰이 불만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럴수록 떳떳하게 나서 당당하게 항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의 섭리가 편재하듯, 어디에나 책임은 있다. 햇볕을 벗어나 그늘 속에 감춰도, 저녁을 지나 다시 아침이 돼도 책임은 언제나 그 주인과 동행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남몰래 담 넘는 도둑이 대낮의 노상강도보다 작은 악행이 아닌 이유다. 절도를 저지른 사람은 천상에 있는 신의 심판보다 지상에 있는 인간 권력을 더 두려워하는 셈 아닌가.

이훈범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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