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과 신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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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l900년, 중국의 어느 사원을 지키고 있던 왕원록이란 도사는 뒷산을 거닐던 중 우연히 동굴의 입구를 발견하였다. 기이하게 여겨 들어가 보니 모든 벽면이 불교예술품으로 가득 찬 이 동굴에는 갖가지 문서가 산적해 있었다. 물론 왕도사는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미구에 세계를 놀라게 하였던 돈황동굴과 돈황문서이었다.
년전에 신안 앞바다에 쳐놓은 어느 어망에서 이상한 그릇이 걸려나왔다. 이런 일은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되니 아무리 무심한 어부도 기이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수천 점의 송·원대 자기를 비롯한 많은 해저유물을 건져 내게된 시초다.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돈황과 신안은 비슷한 셈이다. 그러나 그 뒤의 사정만은 판이하다.
돈황의 경우는 이런 소문이 심심치 않게 나돈 뒤에도 당시의 청조에서 별로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 몇 해 뒤인 l907년,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동양학자「스타인」은 바로 이 동굴에 달려와 수10량분의 고문서를 본국으로 날라 갔다. 또 이듬해에는「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가 남은 수10량분을 반출하였다. 뒤늦게 놀란 청조가 현지에 관원을 파견하니 이미 잔치가 끝난 뒤의 마당 같아서 낙수를 줍는 도리밖에 없었다.
신안의 경우에는 그 유물이 불과 수10점밖에 유출되지 않았을 때 이를 잘 보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 차례의 인양끝에 그 윤곽을 잡게 되었으며, 남은 선체와 유물에도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며, 관계자를 비롯한 많은 국민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던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감동이란 횡재수의 기쁨을 구가하려는 감이 너무 짙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계유수의 중국자기 보유국이 되었느니, 중국도자의 편년을 바꾸게되었느니 굵직한 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어느 때 어느 배에 실렸던 어떤 물건이란 분명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세미나」에서는 그 동안의 연구로 대충 이런 사실이 판명되어 가는 듯하다 .따라서 이 유물들이 광주에 세워질 새 박물관에 진열될 무렵이면, 좀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될 것이며, 우리나라 청자를 보는 눈도 자화자찬에 그쳤던 영역을 벗어나 문화교류사라는 차원에서 의젓하게 몇 마디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마당에서 다시 생각나는 바는 앞서 말한 「스타인」과 「페리오」의 경우다. 그들은 그 문서를 각각 대영박물관과 「파리」의「기유」박물관에 보관한 뒤, 자기이름이 붙은 번호로 정리하여 중국의 불교사·미술사·통교사 등의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런 성과가 없이 그대로 사장하였다면 그들은 약탈자라는 낙인만을 남긴 채「개발에 버선」이라는 세계학계의 빈축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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