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웃고 울며 정상을 향한 고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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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잘했다. 내가 너희들이 괴로와할때마다 얘기한 기쁨의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늘 함께 울고 웃어보자…. 』 오는 9월로 정년퇴직을 앞둔 공주고 진성환 노교장의 목소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야구불모지인 충청도, 그것도 인구3만7천명의 읍에서 고교야구정상정복이라는 새로운 역사의장을 만들기까지는 형언키 어려운 괴로움이 너무나 많았다.
공주고야구부가 창단된 것은 74년3윌9일. 신학기 개학식후 4일만이었다. 동창회장인 김종락야구협회장의 후원과 동창회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팀」이 창단을 결정하자 22회동문인 정기승씨(대한야구협회이사·서울 고법부장판사)가 헌신적으로 나서 당시 강경여상에 있던 야구인 출신인 진교장을 부임시키도록 했고 농협에서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했던 김형빈씨(39)를 설득, 감독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시골에 선수들이 오려고 할 리가 없었다. 대전·대구·서울을 찾아다니며 선수들을 끌어모으기에 정신이 없었다.
각 「팀」에서는 모두 별볼일 없는 선수만 내주었다. 바로 공주고우승의 주역인 오영세투수가 대표적으로 별볼일 없이 불러들인 선수. 하여간 구색은 갖추었다.
훈련이 시작됐다. 밤낮이 없고 시간의 흐름도 잊었다. 김감독은 체중이 10kg이나 줄고 손은 부르텄으며 자면서도 헛소리를 하며 깨어나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김감독은 자진해서 선수들에게 매도 많이 맞았다. 「팀」훈(훈)이 바로「사랑」.
사랑을 바탕으로 뭉쳐진「팀」이기에 선수들이 잘못하면 먼저 감독을 때리라고 하고 다음에 감독이 선수를 야단쳤다.
후원회가 탄생됐다. 정기승부회장이 주동이 돼 양봉욱회장(퇴역장성)등이 회원들에게 회비를 부담시키며 헌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런 노력은 창단 첫해인8월 처음 봉황기대회에 참가, 중암고에 7-0 7회 「콜드·게임」으로 쓴잔을 마셨다. 그후 각종대회에 출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선수들은 의욕을 잃어갔다. 그렇지만 김감독이나 후원회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계속된 훈련으로 채찍질했다.
읍민들도 서로 다투어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공주고는 마침내 충남예선을 통과, 대통령배 대회 첫출전의 관문을 넘어섰고 상승가도를 달려 고교야구의 새 역사를 만들고만 것이다. <노진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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