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다이어리] 런던의 이발사, 김정은 사진 걸었다 괜한 불청객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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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외곽의 이발소 M&M 앞에서 이발사 카림나바흐가 김정은 사진을 실은 할인 행사 포스터를 설명하고 있다. 포스터에는 4월에 커트 요금을 15%깎아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데일리메일 캡처]

“평양에서 왔느냐.”

 15일 오후 영국 런던 외곽의 한 이발소를 찾았는데 옆 가게에서 한 노인이 나오며 한 농담이다. 정작 이발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해는 중천이고 한 집 건너 경쟁 업소는 한창 영업 중인데 그랬다. 노인은 “오늘 워낙 많은 이가 다녀가 일찍 문을 닫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범해 보이는 이곳은 이날자 영국 언론들이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사진을 포스터로 썼다가 북한대사관의 항의 방문을 받았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로 그 이발소였다. 그 사이 대충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발소 주인은 4월 한 달간 남성커트 요금을 15% 깎아 주는 판촉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홍보 포스터를 만들며 김 위원장을 주인공으로 썼다. ‘운 나쁜 날’ 또는 그저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드는 날’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배드 헤어 데이(BAD HAIR DAY?)’란 문구와 함께였다. 최근 북한에서 남자 대학생들에게 김 위원장처럼 머리를 깎으란 지시를 했다는 언론 보도에 착안한 것이다. 다음 날 기대와 달리 엉뚱한 손님들이 가게를 찾았다. 3㎞쯤 떨어진 북한대사관의 직원 2명이었다. 이리저리 촬영하더니 주인에게 포스터를 떼라고 요구했다. 양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우리 경애하는 지도자에게 불경스럽다(disrespectful). 떼라.”

 “포스터일 뿐이다. 우린 늘 유명인들 사진을 붙여 왔다.”

 “유명인이 아니다. 경애하는 우리 지도자다. 당신 이름이 뭐냐.”

 “여긴 북한이 아니라 영국이다. 나가라.”

 주인은 이들이 떠난 뒤 포스터를 뗐다. 일부 손님이 “여긴 민주주의 국가이니 그대로 두라”고 만류했지만 일이 커질까 우려해서였다. 경찰에도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이발사이기도 한 그의 아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사관 직원들은 퉁명스럽고 완고했다. 또 기이했다”며 “재미있었던 건 둘 다 머리 모양은 김정은 스타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모양이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최고 존엄’ 사수에 열중한 북한의 행태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런던의 한 변두리 이발소 포스터를 문제 삼는 해프닝까지 낳은 것이다. 만일 북한의 의도가 공포감을 주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효과는 거뒀다. 노인에게 인터뷰하자고 요청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나 북한 잡혀 가는 것 아닌가. 싫다.” 이웃 가게에서 일하는 이에게도 물었더니 “북한대사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만 할 뿐 자세한 얘기는 꺼렸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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