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1)|<제46화>관세야사 엄승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밀수망국론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1·4후퇴는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 이북지방 사람들 대부분이 부산·마산등지로 피난갔다.
따라서 항도 부산·마산등지에는 한때 실업자가 3백만명이나 들 끊어 밀수가 성행했다.
게다가 「유엔」16개국 군대가 참전하게 됨에 따라 「유엔」군사령부 관리하에 있던 APO(군사우편)는 우리나라 관할 밖이었으므로 치외법권적인 존재가 되었다.
미군PX·군수송선·수송기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형편에서 밀수외래품이 해방후 제일 많이 범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관은 인원부족과 빈약한 장비로 이 엄청난 밀수를 막을 길이 없었다. 할수 있는것이라고는 1951년12월 밀수법에 대한 벌칙강화와 관세법을 개정하여 세관원에게 사법권을 주는 정도였다.
세관 자체내에서는 물론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기풍진작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강성태세관국장은 항장 훈시를 통해 첫째 세관원은 민족중흥의 역군으로서 긍지와 용기를 가질 것, 둘째 외교관처럼 품위와 사법관리로서의 공정성 및 세무원으로서의 정확성을 갖출것, 세째 관세는 비보상적 강제징수이므로 항상 친절을 잊어서는 안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풍진작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세관윈들은 얄팍한 월급봉투 때문에 유혹을 받기 쉬웠다.
우선 생활보장 문제가 선행되어야 된다고 믿었던 최순주재무장관은 편법을 쓰기로 했다.
장관의 내부결재로 세관원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밀수검거 상여금 5할을 자진해서 내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점에서도 밀수가 성행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여금은 당연히 밀수검거자인 세관원장본인 혼자서 타야되는 것인데도 5할을 다른 동료들을 위해 자진해서 내놓기로 한 것을 보면 세관원들이 얼마나 많이 검거실적을 올려 상여금을 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여금의 자진제공제도는 법적 근거는 없었지만 세관원 전직원에게 적용됐고 직원들은 새로 채용될 때 이에 관련된 서약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상여금은 밀수검거 총수입의 2할5푼을 무제한 지급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돌아가는 배당액이 상당히 되었다.
세관원들의 동료애와 협동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세관가와 세관기를 만든 것도 이 때.
세관의 노래가사는 세관직원들로부터 공모했는데 우용해씨(전 주일공사) 작품으로 기억되고 작곡은 김동진씨가 했다.
일종의 행진곡으로 오늘까지 부르고 있는 이 조래의 일절가사는 『반도의 관세선 만리를 쌓고 경국의 높은 이념 쌍후에 지니 관문에 자라온 젊은 정열이 육해공 삼천리를 넓게 덮도다 나가자 앞으로 힘을 합하여 우리는 대한의 경제국방군.』
세관의 노래는 성악가 한평숙씨(미국 이주)가「레코드」에 취입하여 전 세관에 나누어 주었고 직원들은 조회때나 회합이 있을 때마다 합창했다.
그리고 세관기도 직원들에게 공모하여 김창성씨(현 관세협회이사장)의 작품이 당첨된 것으로 이 깃발은 항상 세관청사옥상에서 나부끼고 세관감시선에는 반드시 달고다니게 했다.
가로3, 세로2의 비율에 장방형으로 상중하로 3등분, 청백청의 3색인 이 세관기는 중앙에 빨간색으로 닻(묘)과 세관의「관」자를 약자로 그려 넣은 것이다. 깃발의 상층 푸른색은 하늘 즉 공항을, 중간 하얀색은 땅을, 밑부분 푸른색은 해항을 상징하고 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