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반전과 반핵의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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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의 명분이나 미국의 도덕성을 따지는 논란이 한가롭게 생각되는 까닭은 코앞에 닥친 북핵 문제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나라 안팎의 반전 여론을 알면서도 동맹인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이란 이유로 고심 끝에 지지 성명을 내고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의 존재가 우리에게 이처럼 크게 다가오는 것은 북핵 해결에 있어 미국의 중요성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 집착하며, 미국과의 한판 승부에 체제와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은 이라크전이 끝나면 북핵 해결에 주력하겠다고 공언한다. 또 이라크전 동안에는 북.미 실무 접촉까지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여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라크를 상대로 발휘되는 미국 첨단무기의 위력만큼 북한 지도부를 향한 강한 압박이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문가들은 이라크전이 단기간 내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경우 북한이 느끼는 위협이 엄청날 것이라고 말한다. 북측의 버티기 자세도 누그러질 것이란 분석이다.

또 이들은 군사적 응징에 자신감을 얻은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 인사들의 주장이 북한 다루기에 연장될 것이라고 관측한다. 하지만 유엔 결의도 없이 강행한 이라크전이기에 미국이 북핵 문제에서만큼은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어떤 경우든 사태의 향방은 북한에 달렸다. 북한체제와 지도자를 보는 부시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의 인식은 이라크전 결과와 무관하게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아울러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운데 프랑스.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발했던 만큼 전쟁 종식 이후 미국은 유엔의 역할마저 재검토하려들 가능성도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의 운용 논리가 국제사회와의 합의나 협의에 집착하지 않고 북핵 문제에까지 확산될 여지가 있음을 말한다.

물론 이라크와 북한은 다르다. 핵을 가진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의 후견인 노릇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의 일방적 군사 압박이나 경제 제재에 제동을 걸 것이다. 또 미국조차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 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북한은 생물.화학무기는 물론 한국과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 체계도 갖춰 놓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한 미군뿐 아니라 한국이 반세기 동안 이룩한 모든 것이 북한의 군사 위협 아래 놓여 있다. 북핵 사태의 군사적 해법이 갖는 비합리성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이런 판단에 공감하며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이라 믿어도 될까. 이 또한 다분히 북한이 하기에 달렸다. 안타깝게도 이제까지의 북한은 도박판의 판돈을 올리며 미국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또 미국이 '악의 축'과의 타협에 선뜻 응할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이라크전 결과를 음미하며 북.미 양측이 북핵의 원만한 해결에 의기투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악몽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 땅에 반전과 반핵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 대한 준비다. 한반도 전쟁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반대와 함께 북한의 핵보유에 반대하는 반핵의 목소리가 상당 기간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북핵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될 때 우리가 반핵과 반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한반도내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면 반미에 줄서 북핵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핵을 포기할 경우 국제사회의 지지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반전과 반핵의 첨예한 충돌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한.미동맹도 살고 북핵도 해결된다.
길정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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