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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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도연명이 시골의 어느 원님으로 있을 때 중앙에서 감독관이 시찰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자 부하는 도연명에게 정장을 하고 마중 나가라고 진언했다.
도연명은 분연히 『오두미의 박봉 때문에 시골의 애숭이한테 굽실거릴 수 있겠느냐』면서 사표를 내던지고 고향에 돌아갔다.
월급쟁이는 누구든 도연명처럼 사표를 내던지고싶을 때가 많을 것이다. 그것은 오두미 짜리 말단 사원이든 양 이천 석의 총장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여간해서 사표를 내게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사표를 쓰기는 쉽다. 내용이 간단한 것이다.
사표에는 한결같은 형식이 있다. 『소직은 일신상의 이유로 부득이…』 대개 이런 식으로 나간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때에도 『일신상의 이유』라고 사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다. 도연명이도 이와 비슷한 말을 썼을 게 틀림없다. 아니면 『천학비재의 탓으로 중책을 감당하기 어려움을 통감하며…』하는 식으로 역설을 퍼부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표에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그처럼 사표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표는 꼭 있어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선 사표가 있어야 「의원면직」이라고 처리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해직 내지는 파면의 불미스러움을 겪게된다.
그러나 사표란 무엇보다도 사표를 내는 쪽과 받는 쪽의 겉치레를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서 필요하다. 「사표」란 사임할 뜻을 밝힌 상서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표도 없이 그만둔다는 것은 웃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고사직이라는 게 또 있다. 마땅히 파면시켜야 할 때에 상대방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그런가하면 파면시킬 만큼 괘씸스러우면서도 그럴 형편이 못될 때에 어쩔 수 없이 권고사직 시킨다. 그 어느 경우에나 사표에는 『일신상의 이유』라 적힌다.
서양에서는 사표라는 게 반드시 필요하지가 않다. 사의를 구두로 전해도 좋고 전보로 알려도 좋다. 겉치레가 조금도 문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표를 내는 것도 지극히 일 방적이다. 아무 때고 자기 좋을 때 낸다. 그런다고 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사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 사표를 낼 시기를 잃으면 졸개가 된다. 잘 맞추면 인물이 된다.
우리네 주변에서는 「타이밍」을 잘 맞추는 사람이 많지가 못하다. 인물이 그만큼 귀한 것이다. 따라서 어쩌다 용퇴하는 사람을 보면 여간 반가와 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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